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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ne, 2026

한국 차의 얼굴은 이탈리아가 그렸다

1973년 봄, 이탈리아 토리노. 한국에서 온 한 남자가 자동차 디자인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현대자동차의 첫 사장 정세영이었다. 손에 든 건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계획 하나였다. 그런데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이라는 차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디자인은 이탈리아, 엔진은 일본, 핵심 기술자는 영국. 한국이 직접 만든 부분이 어디인지 한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도 포니는 한국 자동차 역사의 첫 줄에 적힌다. 빌려온 조각으로 짜맞춘 차가 어떻게 '국산차 1호'가 됐을까. 빌려 쓰던 나라 1970년대 초, 한국 도로를 달리던 차는 거의 다 빌려온 차였다. 외국 회사의 설계를 들여와 한국에서 조립한 것들이었다. 자동차를 '만든다'기보다 '조립한다'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현대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포드의 코티나를 들여와 울산에서 조립하고 있었다. 현대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려 했다. 포드와 더 깊이 손잡고, 부품을 한국에서 만들고, 합작 회사를 세우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협상은 부품 국산화와 기술 이전의 폭을 놓고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여러 해를 끌던 끝에 합작은 1973년 끝내 깨졌다 . 빌리지 말고, 만든다 포드가 떠난 자리에서 현대는 갈림길에 섰다. 다른 회사의 차를 다시 빌려 조립하느냐, 아니면 현대의 차를 만드느냐. 현대를 세운 정주영은 빌린 차를 조립하는 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고유 모델을 가져본 적 없는 회사가, 만드는 쪽을 택했다. 그 결정을 떠안은 사람이 정주영의 동생이자 현대차 초대 사장이던 정세영 이었다. 정세영이 직접 토리노로 건너간 게 이 무렵이다. 토리노의 이탈디자인에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포니의 얼굴을 맡았다. 설계 도면과 시제품 값으로 치른 돈은 120만 달러 였다. 얼굴은 샀다. 그런데 주지아로의 도면대로 차를 실제로 만들 사람이 현대에는 없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

일본 경찰이 꽃 8만 그루를 태웠다

1933년 겨울, 강원도 홍천 보리울. 산골 학교 뒤편의 작은 묘목밭으로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밭의 묘목을 한 그루도 남기지 않고 뽑아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타 버린 묘목은 8만 그루. 전부 무궁화였다. 애국가 후렴에 박혀 있는, 지금 우리가 나라꽃이라 부르는 그 꽃이다. 묘목을 기른 사람은 일흔 살의 남궁억이었다. 무궁화를 길렀다는 사실이, 그 겨울에는 죄가 되었다. 붓을 내려놓은 자리 꽃을 심은 노인은 본래 산골 사람이 아니었다. 남궁억은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글을 쓰며 살던 사람이었다. 1898년, 남궁억은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이 되었다. 신문은 기울어 가던 나라에서 붓으로 싸우는 자리였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사라졌다. 신문도 글도 더는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1918년, 병을 얻은 남궁억이 강원도 홍천 보리울로 내려왔다. 서울의 붓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노인이 새로 손에 쥔 것은 묘목 한 그루였다. 학비 대신 자란 꽃 1919년 9월, 남궁억은 보리울에 모곡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 교실 뒤에는 묘목밭을 두었다. 밭에서 기른 것은 무궁화였다. 학비를 못 내는 학생과 학부모가 묘목을 길렀고, 묘목을 기른 삯이 학비를 대신했다. 다 자란 묘목은 전국의 학교와 교회로 실려 나갔다. 가난한 산골 학교 한 곳에서 시작한 일이 조선 곳곳으로 번졌다. 나라꽃을 전국에 심겠다는, 노인의 조용한 작정이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꽃이 죄가 된 이유 일제는 무궁화를 가만두지 않았다. 무궁화가 그냥 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국가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에 박힌 꽃이자, 조선을 가리키는 표시였다. 그래서 일제는 꽃 자체를 더럽히는 말을 퍼뜨렸다.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나라꽃 무궁화의 내력 에는, 당시 무궁화에 붙은 별명이 이렇게 적혀 있다. 보기만 해도 ...

목소리는 남고, 범인은 사라졌다

1991년 1월 29일 밤.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던 아홉 살 형호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11시, 형호의 집 전화가 울렸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서른 안팎의 남자 목소리였다. 전화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6일 동안 같은 목소리가 형호의 집으로 쉰 번 넘게 걸려왔다 (집계에 따라 예순 번을 넘겼다는 기록 도 있다). 경찰은 통화를 전부 녹음했다. 그런데도 목소리의 주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한국 범죄사에서 화성 연쇄살인, 개구리 소년 실종과 함께 가장 오래 풀리지 않은 사건으로 남은 이름 — 이형호 유괴 살해 사건 이다. 1991년, 쫓을 수 없던 시대 첫 전화에서 남자가 부른 것은 현금 7천만 원과 카폰이 달린 자동차 였다. 1991년 서울에서 7천만 원은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에 가까웠고, 차에 다는 카폰은 부유함의 상징이던 시절이다. 형호의 부모는 시키는 대로 돈을 마련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잡을 방법이었다. 1991년 한국에는 금융실명제가 없었다. 누구나 가짜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 수 있었고, 통장을 쥐고 있어도 주인을 거슬러 올라갈 길이 없었다. 은행 안에 카메라도 거의 없었다. 범인이 돈을 찾으려 한 두 곳의 은행 지점에는 CCTV가 한 대도 없었다 . 가짜 이름 통장이 가능했고, 은행에는 CCTV가 없었고, 범인이 현장에 남긴 물증은 없었다. 범인은 공중전화로만 전화를 걸었다. 발신지를 따라가도 길에 선 전화 부스 한 대가 나올 뿐이었다. 협박 메모를 열 차례 넘게 남겼지만 거기서도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손에 쥔 단서는 단 하나, 쉰 번 넘게 녹음된 목소리뿐이었다. 양화대교의 밤 범인이 돈을 받을 자리를 정했다. 양화대교 남단 둔치. 돈을 가져다 두라고 했다. 경찰은 덫을 놨다. 진짜 돈 얼마에 위조지폐 뭉치를 섞어 두고, 다리 주변 어둠 속에 형사들을 잠복시켰다. 형호의 부모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아이를 돌려받기 위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 다리에 깔...

가라앉는 배 위에서 악단은 연주했다

월리스 하틀리는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있었다. 발밑 갑판은 이미 뱃머리 쪽으로 기울고, 사람들은 구명보트 줄로 몰려갔다. 1912년 4월 15일 새벽, 북대서양 한가운데였다. 하틀리 옆에서 일곱 사람이 함께 악기를 들고 있었다. 여덟 명은 그 새벽을 넘기지 못했다. 타이타닉에서 끝까지 연주한 악단 이야기는 워낙 알려져 있다. 침착한 신사들이 음악으로 가라앉는 배 위 사람들을 달랬다는 그림. 그런데 이 여덟 명이 누구였는지를 따라가 보면, 익숙한 그림 뒤에 덜 알려진 사정이 몇 겹 깔려 있다. 처녀항해, 두 팀이 한 배에 올랐다 월리스 하틀리 는 1878년 잉글랜드 북부 콜른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집안에서 자란 바이올리니스트로, 한 배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에서 배로 옮겨 다니며 악단을 이끌었고, 타이타닉은 그가 일하게 된 여러 큰 배 가운데 하나가 될 예정이었다. 타이타닉은 그때까지 만들어진 가장 큰 여객선이었고, 1912년 4월 10일 사우샘프턴에서 첫 항해를 시작했다. 배에 오른 음악대는 모두 여덟 명이었다. 원래는 따로 움직이던 두 팀 이었다 — 식당과 라운지에서 연주하던 다섯 명, 별도의 식당에서 연주하던 세 명. 두 팀은 평소 같이 연주하지 않았다. 한 배에 함께 오르면서 비로소 여덟 명이 한 악단이 되었다. 빙산이 스친 뒤, 악단은 갑판으로 옮겼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타이타닉이 빙산을 긁고 지나갔다. 충돌 30분쯤 뒤, 악단은 1등실 라운지로 불려 갔다. 동요하는 승객을 달래라는 뜻이었다. 구명보트가 한 척씩 내려지는 동안, 악단은 라운지에서 갑판 입구 쪽으로 자리를 옮겨 연주를 이어 갔다. 그 사이 갑판 위 사정은 빠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타이타닉에 실린 구명보트는 스무 척, 정원을 다 채워도 배에 탄 사람의 절반쯤만 태울 수 있었다. 악사들은 보트 줄에 서는 대신 갑판에 남아 악기를 들고 있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

철판 한 장으로 덮었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38분. 서울 성수대교 위로는 출근하는 차와 등교하는 학생들이 뒤섞여 있었다. 무학여고 학생들을 태운 16번 시내버스도 그 위에 있었다. 다리 한가운데, 제10번과 11번 교각 사이의 상판 48미터 가 한순간에 끊어져 20미터 아래 한강으로 떨어졌다. 차 여섯 대가 함께 빠졌다. 이 사고로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 지은 지 15년 밖에 안 된 다리였다. 사람들은 처음에 다리가 낡아서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5년 된 다리는 낡은 다리가 아니다. 멀쩡해 보이던 다리가 출근길 한복판에서 끊어진 이유는, 세월보다 훨씬 사람의 손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날렵하게 짓고 싶었던 다리 성수대교는 1977년에 착공해 1979년 10월 동아건설이 완공했다. 한강에 놓인 다리 가운데 처음으로 거버 트러스라는 공법 을 썼다. 다리를 더 날씬하고 보기 좋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튼튼함보다 미관을 앞세운 선택 이었다. 거버 트러스는 부재 하나하나가 서로를 받치는 구조다. 계산이 간단하고 모양이 우아한 대신, 약점이 하나 있었다. 핵심 부재 하나가 끊어지면 그 무게를 나눠 받을 곳이 없어 전체가 함께 내려앉는다. 우아함과 위태로움이 같은 설계 안에 들어 있었다. 다리는 멀쩡하거나, 아니면 통째로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다리가 놓일 때 강남은 아직 논밭에 가까웠다. 설계는 하루 차량 8만 대를 견디도록 잡혔고, 1979년의 교통량에는 넉넉한 숫자였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두 배가 된 무게 1993년, 동부간선도로 성수~상계 구간이 뚫렸다. 강남이 커지면서 다리를 건너는 차가 빠르게 늘었다. 설계 기준이 하루 8만 대였는데, 1994년에는 하루 16만 대 가 다리를 밟고 지나갔다. 견디기로 한 무게의 두 배가 매일 다리를 짓눌렀다. 여기서 앞 장의 부실한 용접이 문제가 된다. 한 번에 끊어질 정도는 아니어도, 약하게 박힌 용접 자리에 매일 두 배의 무게가 실리면 금속에는 눈에 안 보이는 미세한 균열이 자란다. ...

다음 임금의 어머니가 사약을 받았다

1482년 8월, 한양의 한 사가. 마당에 사약 한 사발이 놓였다. 사발 앞에 앉은 여자는 삼 년 전까지 이 나라의 왕비였다. 그리고 윤씨가 낳은 다섯 살 아들은, 다음 임금이 될 세자였다. 왕비가 폐위되는 일도 드물었다. 폐위된 왕비에게 사약이 내리는 일은 더 드물었다. 그런데 사약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 임금 성종이었다. 훗날 연산군이 되는 다섯 살 아이의 친아버지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게 자격이 된 여자 폐비 윤씨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 윤기견은 윤씨가 궁에 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집안에는 내세울 권세도 재산도 없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 1473년, 성종이 후궁을 들였다. 윤씨가 숙의로 뽑혔다. 뽑힌 까닭 가운데 하나가, 역설적이게도 든든한 친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외척이 설칠 걱정이 없는 여자 라는 이유로, 궁은 윤씨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성종은 열세 살에 임금이 됐다. 어린 임금 뒤에는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고, 조정은 한명회 같은 훈구 대신들의 손안에 있었다. 성종의 첫 왕비 공혜왕후가 바로 그 한명회의 딸이었다 . 1474년 공혜왕후가 자식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 왕비 자리가 비자, 성종은 권세 큰 집안의 딸을 다시 들이는 대신 반대쪽으로 갔다. 가진 것 없는 여자였다. 1476년, 윤씨가 성종의 아이를 가졌다. 같은 해 윤씨는 숙의에서 곧바로 왕비에 올랐고, 아들 융을 낳았다. 가진 것 없던 집 딸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다. 왕비의 자리는 임금의 마음 하나에 매여 있었다 궁에는 임금의 여자가 많았다. 왕비라는 자리도 결국 임금의 마음 하나에 매여 있었다. 윤씨는 그 자리를 지키려 했고, 후궁들과 자주 부딪쳤다. 가진 것 없이 자라 처음으로 손에 쥔 자리였다. 자리를 놓으면 돌아갈 곳은 다시 가난한 친정뿐이었다. 1477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이 나왔다. 후궁들을 해치려 했다는 혐의가 붙었다. 윤씨가 정말 독을 쓰려 했는지, 누군가의 모함...

퀴리의 공책은 납에 갇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하. 한 연구자가 장갑을 끼고 각서에 서명을 한다. 보호장비를 갖춘 다음에야 상자가 열린다. 안에 든 것은 낡은 공책 한 권. 마지막으로 글씨가 적힌 것은 90여 년 전이다. 그래도 공책에서는 아직 방사선이 나온다. 공책의 주인은 마리 퀴리다. 화학 노트였다.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맨손으로는 넘길 수 없다 . 왜 한 사람의 공책이 한 세기가 지나도록 위험할까. 답은 마리 퀴리가 평생 쫓은 가루 한 줌에 있다. 빛나는 가루를 쫓은 사람 1898년 파리. 비가 새는 낡은 창고에서 두 사람이 우라늄 광석을 끓였다. 한 사람은 피에르 퀴리, 다른 한 사람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온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 곧 마리 퀴리였다. 마리 퀴리가 떠나온 폴란드는 그때 지도에 없었다.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나라를 셋으로 갈라 가진 지 100년이 넘던 때였다. 두 사람은 그해 새로운 원소 둘을 세상에 알렸다 . 하나는 폴로늄. 마리 퀴리가 지도에서 사라진 조국의 이름을 붙였다. 다른 하나가 라듐이었다. 라듐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희미하게 빛났다. 라듐을 손에 쥐는 일은 쉽지 않았다. 광석을 수 톤씩 끓여야 가루 한 줌이 나왔다. 흔히 "퀴리가 라듐 0.1그램을 건졌다"고 하지만, 좀 더 정확히는 1902년에 염화라듐 0.1그램을 분리 한 것이었다. 순수한 라듐 금속을 손에 넣은 것은 다시 8년이 지난 1910년이다. 몇 해 동안 끓인 광석에서 남은 것이 그만큼이었다. 요정의 불빛 라듐을 손에 넣은 마리 퀴리는 라듐을 곁에서 떼지 않았다. 라듐을 담은 시험관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책상 서랍에도 두었다 . 밤이 되면 작업실로 갔다. 선반 위에 늘어선 시험관들이 스스로 푸르스름하게 빛을 냈다. 밤에 작업실에 들어가면 사방에서 시험관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빛나는 시험관들은 마치 요정의 불빛 같았다. 이 문장은 마리 퀴리가 1923년에 쓴 남편 피에르의 전기에 남아 있다 . 마리 퀴리는 라듐을 곁에 두는...

리초만 알아들었다

2020년 4월 4일, 인도 안다만 제도의 포트블레어. 리초라는 여자가 숨을 거뒀다. 리초가 떠나자, 책장에 사전이 한 권 멀쩡히 꽂혀 있는데도 다시는 되살릴 수 없는 것이 하나 남았다. 사레어를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리초는 그레이트 안다만 부족의 언어, 사레어를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사전은 있었다. 문법서도, 노래를 묶은 책도 있었다. 그런데도 언어가 끝났다고 말하는 이유는, 종이에 적히지 않는 무언가가 리초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섬에 5천 명이 살았다 그레이트 안다만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떠난 첫 인류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생존 국제연대(Survival International) 는 이들을 약 7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갈라져 나온 무리의 자손으로 본다. 어느 쪽이든, 안다만 제도의 섬에서 수만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1858년, 영국이 포트블레어에 형무소를 세우며 섬으로 들어왔다. 그 무렵 그레이트 안다만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를 두고는 기록이 갈린다. 생존 국제연대는 약 5천 명으로 적고, 다른 추정 은 3천5백 명 안팎을 말한다. 다만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갈리지 않는다. 처음엔 충돌로, 곧이어 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폐렴, 홍역, 매독. 면역이 없는 병이었다. 1961년, 섬에 남은 그레이트 안다만 사람은 19명 이었다. 리초는 줄어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지라케는 부족의 왕이라 불렸고, 리초는 지라케의 첫 아이였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2000년, 언어학자가 찾아왔다 2000년 무렵, 언어학자 안비타 아비가 안다만 제도에 닿았다. 사라져 가는 그레이트 안다만 말을 기록하러 온 사람이었다. 받아 적으려면, 입으로 말을 불러 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리초가 그 일을 맡았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소리 내어 불러 주는 일이었다. 한 번에 끝...

죽은 건 헨리에타뿐이었다

1951년 1월, 볼티모어. 서른한 살 여자가 병원 문을 열었다. 의사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답을 받으러 온 것에 가까웠다. 자기 몸 안에 잡히는 멍울을,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헨리에타 랙스. 다섯 아이의 엄마였다. 막내를 갖기도 전부터 사촌들에게 "속에 뭔가 잡힌다"고 말해 왔다( Embryo Project ). 1951년 10월, 헨리에타는 죽었다. 그런데 그 멍울은, 75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다. 담배밭에서 볼티모어까지 헨리에타는 1920년 8월 1일, 버지니아주 로어노크에서 태어났다. 처음 받은 이름은 로레타 플레전트였다고 전한다. 언제 어떻게 '헨리에타'로 불리게 됐는지는 기록이 분명치 않다( Wikipedia ). 어머니를 일찍 여읜 헨리에타는 버지니아 클로버의 친척 집에서 자랐다. 식구들이 나눠 살던 집은 한때 노예들이 머물던 통나무집이었고, 어린 헨리에타는 담배밭에서 일했다( Britannica ). 사촌이던 데이비드 '데이' 랙스와 결혼했고,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일자리를 따라 볼티모어 인근으로 옮겨 갔다. 남편은 제철소에서 일했다. 남부의 담배밭에서 북부의 공장 동네로 향한, 그 시절 흔한 길 하나였다. 흑인을 받아주는 병원이 거기뿐이었다 1950년 11월, 헨리에타는 다섯째 조지프를 낳았다. 출산이 끝나도 멍울은 사라지지 않았다. 1951년 1월 29일, 헨리에타는 존스홉킨스로 향했다( Embryo Project ). 멀어서 마지막으로 고른 게 아니라, 볼티모어에서 흑인을 치료해 주는 큰 병원이 거의 거기뿐이었기 때문이다. 존스홉킨스는 본래 가난한 사람을 위해 세워진 병원이었다. 인종을 이유로 환자를 돌려보내지도 않았다. 다만 1951년의 병동은 그 시대의 규칙대로 흑인과 백인이 나뉘어 있었고( Johns Hopkins Medicine ), 헨리에타가 누운 곳은 '유색인' 병동이었다. 멍울 하나를 보러 도시를 가로질러야 했던 이유가, ...

나라가 밤 12시에 사라졌다

밤 11시 반, 서울. 자정이 가까워지면 거리는 매일 같은 풍경이었다. 사람들이 집을 향해 뛰었다. 자정 전에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그 밤을 파출소에서 보내야 했다. 12시가 되면 거리마다 사이렌이 울렸고, 철제 바리케이드가 길을 막았다. 사이렌은 36년 4개월 동안 거의 매일 밤 울렸다. 1982년 1월 5일 밤 12시, 사이렌이 처음으로 울리지 않았다. 한 세대가 평생 들어 온 소리가, 그날 밤 거리에서 빠졌다. 전쟁이 만든 줄 알지만, 전쟁보다 먼저였다 야간 통행금지를 6·25 전쟁의 산물로 아는 사람이 많다. 통금은 전쟁보다 5년 가까이 앞섰다. 시작은 1945년 9월 8일이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바로 그날, 미 군정 사령관의 일반명령으로 통행금지가 내려왔다 . 서울과 인천에서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사람들은 거리에 나설 수 없었다. 처음엔 임시 조치였다. 그러나 통금은 풀리지 않고 전국으로 퍼졌다. 1961년부터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로 시간이 굳었다. 매일 밤 네 시간씩 사람들은 집 안에 갇혔고, 사이렌에 맞춰 잠들던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됐다. 어른들은 11시 반이면 술자리에서 일어섰다. 통금은 노래 한 곡까지 멈췄다. 1971년 배호가 부른 〈영시의 이별〉은 금지곡이 됐다 . 자정에 헤어진다는 가사가 통금을 어기도록 부추긴다는 이유였다. 자정이라는 시각은 노래 가사 안에서도 위험한 시간이 되어 있었다. 출산도, 초상도, 통행증이 있어야 했다 통금은 법이었지만, 밤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 아기가 나오려 했고, 자정이 지나 노인이 길에서 쓰러졌다. 그래서 예외가 있었다. 출산, 질병, 초상 같은 불가피한 일에는 통행증이 나왔다 . 급한 환자를 옮기던 사람은 사정을 말하면 관행상 대체로 통과시켜 줬다는 기록이 있다 . 예외에 들지 못한 사람은 달랐다. 통행증 없이 자정 거리에서 붙잡히면 거동수상자로 파출소에 끌려가 유치장에서 밤을 보냈고, 통금이 풀리는 새벽이면 즉결심판에 넘겨졌...

맥주가 물을 팔아 1위가 됐다

1993년 봄, 거실의 TV에서 맥주 광고가 흘러나왔다. 30초짜리였다. 그런데 화면에 맥주가 비친 건 마지막 3초뿐이었다. 나머지 27초 동안 흐른 것은 물이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다는 물. 맥주를 만드는 회사가 광고에서 맥주를 치우고 물을 내세웠다. 40년 가까이 줄곧 2등이던 조선맥주였다. 그리고 3년 뒤, 조선맥주는 1등이 됐다. 술 회사가 '물 맛'으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맥주 맛이 아니라 물을 앞세워서. 1933년, 두 맥주가 같은 출발선에 섰다 1933년, 한반도에 맥주 회사 두 곳이 나란히 세워졌다. 한 곳은 조선맥주, 다른 한 곳은 훗날 OB가 되는 동양맥주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회사 는 같은 출발선에 있었다. 해방과 전쟁을 지나는 사이 한쪽이 앞서 나갔다. 동양맥주의 OB였다. 1990년대 초가 되자 OB의 시장 점유율은 70%를 넘었고, 조선맥주는 그 절반에도 닿지 못했다. 조선맥주는 1967년부터 박경복 회장이 이끌었지만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맥주 맛으로 정면에서 부딪쳐선 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1991년, 박경복의 아들 박문덕이 조선맥주 사장으로 취임했다 . 40년 가까이 굳어 있던 2등의 자리를 물려받은 셈이었다. 박문덕은 맥주 대신 물을 팔기로 했다 1993년은 조선맥주 창립 60주년이었다. 사장이 된 지 2년 만에, 박문덕은 정면 승부를 버렸다. 맥주 맛으로 OB를 넘는 길을 접고 다른 것을 팔기로 했다. 물이었다. 조선맥주는 지하 150미터에서 끌어올린다는 천연 암반수를 앞세웠다. 제품 이름부터 물에서 나왔다. '하이트(hite)'는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올린다는 영어 'height'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광고 카피도 맥주가 아니라 물을 말했다. 100% 천연수로 만든 순수한 맥주, 하이트. — 하이트 런칭 광고(1993) 광고의 구성도 거꾸로였다. 30초 가운데 맥주가 비친 건 마지막 3초, 나머지 27초는 물이 흘렀다...

소녀들은 동전과 함께 사라졌다

1971년, 서울. 버스마다 열여덟 살쯤 된 소녀가 한 명씩 타고 있었다. 만원버스 문에 매달려 "오라이"를 외치고, 승객에게 요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줬다. 그리고 하루 운행이 끝나면, 소녀는 회사 앞에 줄을 서서 몸수색을 받았다. 회사가 소녀의 몸에서 찾던 것은 동전이었다. 하루 동안 승객에게 받은 잔돈 몇 닢. 그해 전국의 버스 안내양은 33,504명 , 대부분 열여덟 살 안팎이었다. 동전 몇 닢 때문에, 매일 밤 열여덟 살의 몸수색이 되풀이됐다. 소녀들은 시골에서 올라왔다 버스 안내양이라는 일은 1961년에 처음 생긴 게 아니다.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안내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까지 닿는다. 1961년 8월에 정부가 다시 들인 것은 '여차장제'였다. 남자 차장이 앉던 자리를, 더 어리고 임금이 더 싼 여성이 채웠다. 대부분 시골에서 막 올라온 소녀들이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마치고, 집에 돈을 부치려고 버스에 올랐다. 일은 단순해 보였다. 문을 열고 닫고, 요금을 받고, 정류장을 외치는 것. 그러나 버스는 늘 만원이었고, 소녀는 출입구 손잡이에 매달린 채 달렸다. 1975년 서울시 조사에서 안내양의 하루 노동은 18시간 27분 이었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쉰다'는 서울시가 내건 모범 기준일 뿐 , 현장에서는 한 달에 서너 번 쉬는 게 고작이었다. 1982년과 1983년 부산에서 안내양을 조사한 자료에서는 대상의 85%가 요통을 앓고 있었다 . 종일 흔들리는 버스 출입구에 매달려 있던 몸이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니게임 ▶ Google Play에서 설치 🎬 영상으로 보기 몸수색의 진짜 이유는 돈이었다 버스 한 대의 하루 매출은 전부 소녀의 손을 거쳤다. 동전은 소녀의 주머니로 들어갔다가, 밤이 되면 회사로 넘어갔다. 그러니 회사는 한 푼이라도 새어 나갈까 의심했다. 받은 요금을 빼돌린다는 의심, 속칭 ...

약이 떨어지자 목탄을 들었다

1942년 12월, 스탈린그라드. 한 독일 군의관의 손에는 더 이상 약도, 붕대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쥔 것은 목탄 한 자루였다. 도시 안에는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가는 병사가 수십만 명이었다. 군의관은 그 환자들을 등지고, 노획한 소련군 지도 한 장을 뒤집어 빈 뒷면 앞에 앉았다. 그가 그리려던 것은 작전 지도도, 부상자 명단도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기였다. 약이 떨어진 자리에서 의사가 목탄을 든 이 이야기는 '스탈린그라드 성모' 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세 도시의 교회에 걸려 있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갇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곳은 평범한 전선이 아니었다. 1942년 11월,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양옆에서 감싸는 큰 작전을 시작했다. 우라누스 작전 이라 불린 이 포위는 11월 23일 , 남북에서 진격하던 두 부대가 칼라치에서 만나며 닫혔다. 포위망 안에 갇힌 독일 6군은 25만에서 29만 명에 이르렀다. 도시 밖으로 나가는 길은 모두 끊겼고, 보급은 하늘 하나만 남았다. 영하 30도 속에서 빵과 탄약이 줄었지만, 수송기는 약속한 양의 일부만 실어 왔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병원 천막이었다. 약과 붕대가 동나자,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매일 조금씩 사라졌다. 목사였다가 의사가 된 사람 포위망 안에 군의관 쿠르트 로이버가 있었다. 로이버는 원래 의사가 아니었다. 시골 마을의 목사였다가 뒤늦게 의학을 배웠고, 1939년 군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왔다. 병상은 늘고 약은 줄어드는 겨울 동안, 의사로서 로이버가 줄 수 있는 것은 빠르게 바닥났다. 성탄이 다가오자, 로이버는 다른 결심을 했다. 약으로 줄 수 없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병사들에게 건네기로 한 것이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쌤 1인 과외 학생관리 · 메모 한 줄로 수업료 청구 자동 생성 ▶ Google Play에서 설치 노획한 지도 뒷면에 그린 성모 '스탈린그라드 성모'라는 이름을 들으면 금빛 성화를 떠올리기 쉽다. 실제 그림은 그렇지 ...

택시 200대가 군인 쪽으로 갔다

1980년 5월 20일 저녁 6시, 광주 무등경기장 앞. 한 택시 기사가 핸들을 쥐고 전조등 스위치를 올렸다. 옆 차도, 그 옆 차도 따라 불을 켰다. 잠시 뒤 200대 가까운 택시가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도청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 앞줄엔 대형 트럭과 버스가 섰고, 뒤로 택시가 길게 줄을 이었다. 택시는 기사들이 하루를 버는 밥줄이었다. 그 밥줄을 몰고 곤봉과 최루탄이 선 쪽으로 향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공수부대가 내려온 도시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권력은 신군부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튿날 광주에 공수부대가 내려왔다 . 군인들은 거리에서 학생과 시민을 곤봉과 대검으로 다뤘다. 외부로 통하는 전화가 끊기고 도로가 막히면서, 광주는 바깥과 떨어진 섬처럼 고립돼 있었다. 택시 기사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싸움이 아니라 운반이었다. 피를 흘리는 사람을 태우고 병원으로 달렸다 . 그런데 계엄군은 부상자를 실은 택시를 세웠다. 환자와 운전사를 함께 끌어내려 다시 때리고 데려갔다. 도망치는 학생을 태운 택시는 대검에 찔렸다. 2017년 경향신문에 증언을 남긴 기사 이행기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건 폭력이 아니라 살인이었어요. 혼자서는 안 됐다 택시 한 대가 부상자를 실으면 군인들이 곧바로 차를 세워 기사를 끌어냈다. 한 대로는 사람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기사들은 입에서 입으로 시각과 장소를 정했다. 5월 20일 저녁 6시, 무등경기장 앞. 택시는 기사 대부분이 가진 거의 전부였다. 그 전부를 최루탄 앞에 세우기로 마음을 정하면서, 기사들은 같은 말을 입에 올렸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200개의 전조등 약속한 시각, 200대 가까운 차가 한꺼번에 ...

칼은 살을 찌른 적이 없다

1959년 12월, 할리우드의 한 촬영장. 욕실 세트 하나가 일주일 동안 세워졌다 뜯기기를 반복했다. 12월 17일부터 23일까지 , 앨프리드 히치콕은 단 45초짜리 장면 하나를 찍었다. 그 45초를 위해 카메라를 78번 다시 놓았다. 칼이 여자의 몸을 찌르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완성된 45초는 영화사에서 가장 무서운 살인 장면으로 남았다. 칼날이 살을 가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채로. 정점에 있던 거장의 초라한 선택 1959년의 히치콕은 정점에 있었다. 〈현기증〉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막 끝낸 참이었다. 큰 예산, 컬러 필름, 대형 스타가 보장된 자리였다. 그런데 히치콕은 다음 영화 〈사이코〉를 반대로 갔다. 흑백으로, 텔레비전 시리즈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을 찍던 자기 TV 촬영팀과 함께, 싸게 찍기로 했다. 거장의 선택치고는 초라했다. 더 이상한 결정이 따로 있었다. 관객이 주인공이라 믿고 따라온 여자, 마리온 크레인을 영화가 절반도 지나기 전에 죽이기로 한 것이다. 간판 스타가 중반에 사라지는 건 당시 영화에 없던 일이었다. 히치콕은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극장에 상영 도중 입장을 막는 규칙 까지 요구했다. 마리온이 죽은 뒤 들어온 관객은, 누가 주인공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보여주지 않기로 한 결정 1959년의 미국 영화에는 제작 규정이 있었다. 알몸도, 칼이 살에 박히는 장면도 화면에 그대로 담을 수 없었다. 히치콕은 이 제약을 정면으로 받는 대신 거꾸로 이용했다 . 히치콕은 살인을 한 덩어리로 찍지 않았다. 짧은 조각으로 잘게 쪼갰다. 칼, 비명, 흐르는 물, 손, 타일. 조각 하나하나는 검열관이 트집 잡을 게 없었다. 그런데 빠르게 이어 붙이자, 나머지는 관객의 머릿속이 알아서 채웠다. 칼날과 살갗이 한 화면에 같이 담긴 적은 끝내 없었다. 히치콕은 훗날 프랑수아 트뤼포와의 대담에서 자기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관객을 연출하고 있었다. 오르간을 연주하듯 관객을 다뤘다고 해...

다섯 아이는 산을 떠난 적 없었다

1991년 3월 26일 아침, 대구 성서. 같은 동네에 살던 초등학생 다섯이 집을 나섰다. 아홉 살부터 열세 살까지, 손에는 빈 병이나 비닐봉지를 들었을 것이다. 도롱뇽 알을 주우러 와룡산에 간다고 했다. 와룡산은 차를 탈 일도 없는, 걸어서 닿는 동네 뒷산이었다. 저녁이 돼도 다섯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학교가 문을 닫은 날 다섯 아이가 산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그날의 사정이 있다. 1991년 3월 26일은 30년 만에 기초의회 선거가 부활한 날 이었다. 투표를 위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학교가 문을 닫았고, 갈 곳이 생긴 아이들은 산으로 향했다. 어른들이 투표소로 가던 아침, 아이들은 반대쪽 산길로 걸어 올라갔다. 1991년의 대구 성서는 지금처럼 아파트가 들어찬 동네가 아니었다. 와룡산은 아이들이 도롱뇽을 잡고 도토리를 줍던, 누구나 아는 앞산이었다.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들이 손전등을 들고 그 익숙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개구리소년'이라는 이름의 오해 사건은 오랫동안 '개구리소년 실종' 으로 불렸다. 그런데 다섯 아이가 주우러 간 것은 개구리가 아니었다. 한 아이가 남긴 말은 "아빠, 도롱뇽 알 찾아올게요" 였다. 정확히는 개구리알이 아니라 도롱뇽 알이었지만, 부르기 쉬운 쪽으로 이름이 굳었다. 이름이 사실보다 빨리 퍼지는 일은 흔하다. 수색의 규모는 단일 실종 사건으로는 비교할 데가 없었다. 군과 경찰, 예비군까지 동원돼 연인원 약 35만 명이 와룡산과 인근을 뒤졌고, 전단은 1000만 장 가까이 뿌려졌다 . 산은 헬기까지 떠서 훑었다. 그래도 다섯 아이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와룡산은 이미 다 뒤졌다고들 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니게임 ▶ Google Play에서 설치 🎬 영상으로 보기 다섯 아버지는 트럭에 올...

체르노빌의 셋은 죽지 않았다

1986년 5월, 체르노빌. 세 남자가 잠수복을 입고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원자로 4호기 아래로 내려갔다. 발밑은 물이 고인 캄캄한 지하였고, 머리 위로는 녹아내린 핵연료가 언제 흘러내릴지 모르는 자리였다. 밖에서 기다리던 동료들은 그 길을 자살 임무라 불렀다. 살아서 나온다는 약속을,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다. 아나넨코, 베스팔로프, 바라노프. 세 사람은 흔히 체르노빌의 잠수부 로 불린다. 유럽을 구하고 며칠 만에 방사능으로 숨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런데 그 이야기는, 이름부터가 사실과 어긋나 있다. 아흐레 전, 무엇이 무너졌나 1986년 4월 26일 새벽, 안전 시험을 하던 4호기가 폭발했다. 흑연이 불탔고, 도시 프리피야트의 주민들은 며칠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일상을 보냈다. 소련이 원자력을 국가의 자부심으로 내세우던 시절이었다. 불을 끄려고 쏟아부은 물과 원자로에서 새어 나온 냉각수는 갈 곳을 잃고 원자로 바로 아래 지하 수조로 흘러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약 2만 톤에 이르는 물 이 그 아래 고였다. 문제는 위에서 천천히 녹아 흘러내리던 핵연료 덩어리였다. 1,000도가 넘는 그것이 고인 물에 닿으면 순간적으로 거대한 증기가 발생해 2차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당시 과학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건, 그 2차 폭발이 1차 폭발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오염시키리라는 점이었다. 막을 방법은 단순하면서도 끔찍했다. 지하의 배수 밸브를 사람 손으로 직접 여는 것. 그 밸브는 방사능이 가득 찬 지하 미로 끝에 있었다. 밸브를 아는 사람 누가 내려갈 것인가. 답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그 지하의 배수 밸브가 어디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기계 기술자 아나넨코였기 때문이다. 길을 아는 사람이 가지 않으면, 다른 누가 가도 캄캄한 미로에서 헤맬 뿐이었다. 아나넨코가 앞장서 밸브 위치를 안내하고, 선임 기술자 베스팔로프가 또 하나의 밸브를 맡았다. 당직 책임자였던 바라노프는 손전등으로 두 사람의 뒤를 비추기로 했다....

산도, 오븐부터 손으로 만들었다

1961년, 서울 중림동. 윤태현이 자기 손으로 짜 올린 오븐 앞에 섰다. 비스킷 만드는 기계가 이 나라에 한 대도 없던 때였다. 오븐에서 크림을 끼운 과자 한 장이 나왔다. 이름은 크라운산도였다. 누구나 한 번쯤 입에 넣어 본 과자다. 그런데 이 과자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그리고 '산도'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과자다운 과자는 부대 담장 밖에 있었다 해방 직후, 한국에서 버터 향이 나는 과자는 거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것뿐이었다. 국내에는 비스킷을 굽는 기술 자체가 없었다. 단맛이 도는 과자는 늘 담장 너머에 있었고, 그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이 보통 사람의 몫이었다. 윤태현이 서울 중림동에 작은 과자점을 낸 건 1947년이다. 처음 간판은 영일당제과였다. 그러다 1956년에 가게 이름을 크라운제과로 바꿨다 . 외국 과자를 구경만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그걸 넘어설 국산 비스킷을 직접 만들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무렵이었다. 오븐도, 크림 기계도 손으로 짰다 마음만으로 비스킷이 구워지지는 않았다. 우선 오븐이 있어야 했는데, 시중에 살 만한 오븐이 없었다. 윤태현은 미군 기지와 몇 안 되는 과자 공장을 기웃거리며 어깨너머로 기계의 생김새를 익혔고, 긴 터널식 오븐을 손으로 짜 올렸다. 굽는 문제가 풀리자 더 까다로운 벽이 남았다. 비스킷 두 장 사이에 크림을 똑같은 양으로 끼우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해 주는 기계 역시 어디서도 살 수 없었다. 윤태현은 크림을 자동으로 짜 넣는 충전기까지 직접 만들었다. 그렇게 196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크림을 끼운 비스킷 이 나왔다. 이름이 크라운산도였다. 본국에서 보급품 과자가 꼬박꼬박 들어오던 미군들조차 크라운산도를 더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급 과자의 원조' 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즈음이다. 얼마나 팔렸는지는 숫자보다 셈법을 보는 편이 정직하다. 회사 셈으로는 그동안 전 국민이 한 사람당 평균 쉰 개쯤...

우산만 주인에게 안 돌아왔다

1975년 겨울, 도쿄. 한 남자가 우산 12만 개 사이를 걸었다. 단 하나를 찾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이이즈카 마사오, 도쿄 경시청 유실물센터의 소장이었다. 전철과 버스와 택시, 백화점 우산꽂이에서 흘러나온 우산이 그해 겨울 센터 한 곳에만 12만 개 쌓여 있었다고 당시 기록은 전한다( Stars and Stripes, 1975 ). 12만 개 사이에서, 언젠가 주인이 돌려받으러 올 단 하나를 골라 보관하는 게 소장의 일이었다. 10엔에도 신고서가 적히는 나라 우산이 그렇게까지 쌓일 수 있었던 건, 일본이 잃어버린 물건을 진지하게 세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이 전국 단위로 분실물 통계를 잡기 시작한 해는 1971년이다( 日本経済新聞 ). 그 전에도 물건은 들어왔지만, 나라 전체가 "무엇이 얼마나 잃어버려지고 얼마나 돌아오는가"를 숫자로 적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밑바닥에는 동전 한 닢짜리 습관이 있었다. 길에서 10엔을 주운 아이가 가까운 파출소로 가져가 신고서를 적는 풍경은 일본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More Than Tokyo ; 10 yen coin ). 값이 아니라 약속의 문제였다. 잃어버린 물건에는 주인이 있다는 약속. 값을 묻지 않는 법 일본의 유실물법은 물건의 값을 묻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파는 500엔 짜리 비닐우산도, 현금이 든 지갑과 똑같이 접수되고 똑같이 기록됐다( TOKYO UPDATES, 도쿄도 ).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역 앞 편의점에서 한 자루씩 사고, 비가 그치면 어딘가에 두고 가는 그 흔한 우산도, 법 앞에서는 엄연한 누군가의 분실물이었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비닐우산 문화가 겹쳤다. 싸고, 흔하고, 어디서든 다시 살 수 있는 물건. 그래서 잃어버리는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 들어오는 우산은 멈추지 않았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쌤 1인 과외 학생관리 · 메모 한 줄로 수업료 청구 자동 생성 ▶ Google Play에서 설치 우산에 2주가 붙던 날 최근 통계로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