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물을 팔아 1위가 됐다
1993년 봄, 거실의 TV에서 맥주 광고가 흘러나왔다. 30초짜리였다. 그런데 화면에 맥주가 비친 건 마지막 3초뿐이었다. 나머지 27초 동안 흐른 것은 물이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다는 물.
맥주를 만드는 회사가 광고에서 맥주를 치우고 물을 내세웠다. 40년 가까이 줄곧 2등이던 조선맥주였다. 그리고 3년 뒤, 조선맥주는 1등이 됐다. 술 회사가 '물 맛'으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맥주 맛이 아니라 물을 앞세워서.
1933년, 두 맥주가 같은 출발선에 섰다
1933년, 한반도에 맥주 회사 두 곳이 나란히 세워졌다. 한 곳은 조선맥주, 다른 한 곳은 훗날 OB가 되는 동양맥주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회사는 같은 출발선에 있었다.
해방과 전쟁을 지나는 사이 한쪽이 앞서 나갔다. 동양맥주의 OB였다. 1990년대 초가 되자 OB의 시장 점유율은 70%를 넘었고, 조선맥주는 그 절반에도 닿지 못했다. 조선맥주는 1967년부터 박경복 회장이 이끌었지만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맥주 맛으로 정면에서 부딪쳐선 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1991년, 박경복의 아들 박문덕이 조선맥주 사장으로 취임했다. 40년 가까이 굳어 있던 2등의 자리를 물려받은 셈이었다.
박문덕은 맥주 대신 물을 팔기로 했다
1993년은 조선맥주 창립 60주년이었다. 사장이 된 지 2년 만에, 박문덕은 정면 승부를 버렸다. 맥주 맛으로 OB를 넘는 길을 접고 다른 것을 팔기로 했다. 물이었다.
조선맥주는 지하 150미터에서 끌어올린다는 천연 암반수를 앞세웠다. 제품 이름부터 물에서 나왔다. '하이트(hite)'는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올린다는 영어 'height'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광고 카피도 맥주가 아니라 물을 말했다.
100% 천연수로 만든 순수한 맥주, 하이트. — 하이트 런칭 광고(1993)
광고의 구성도 거꾸로였다. 30초 가운데 맥주가 비친 건 마지막 3초, 나머지 27초는 물이 흘렀다. 맥주 회사가 제 맥주를 숨긴 셈이었다. 평소라면 통할 리 없는 광고였다.
2년 전, 한 나라가 물에 데여 있었다
하지만 1993년의 한국은 평소가 아니었다. 2년 전, 온 나라가 마시던 물에 데인 일이 있었다.
1991년 3월, 경북 구미. 두산전자 공장에서 페놀 30여 톤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었다. 강은 대구 사람들의 식수원이었다. 수돗물에서 냄새가 올라온 건 이미 물을 마신 뒤였다. 분노는 거리로 쏟아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페놀을 흘린 두산전자는 두산그룹 계열사였고, OB 맥주를 만드는 동양맥주 역시 같은 두산그룹이었다. 물을 더럽힌 회사와 1등 맥주를 만드는 회사가 한 식구였던 것이다. 불매가 번지자 OB의 점유율은 한 분기 만에 69%에서 55%로 주저앉았다.
두산은 곧 점유율을 되찾았다. 되찾지 못한 것은 사람들 마음에 남은 물에 대한 불안이었다. 흔히 하이트의 역전을 깨끗한 물맛이나 영리한 광고의 결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광고가 통한 바탕에는 1991년의 페놀이 깔려 있었다. 물에 데인 불안이 채 가시기 전, 조선맥주가 '깨끗한 물로 만든 맥주'를 내민 것이다. 하이트가 판 것은 맥주 맛이 아니라, 페놀 사건이 깔아둔 물에 대한 공포에 가까웠다.
1996년, 물의 이름이 1위가 됐다
1996년, 조선맥주는 처음으로 OB 앞에 섰다. 하이트 43%, OB 41.6%. 1933년 같은 해에 태어나 40년 넘게 뒤를 따르던 회사가, 1.4%포인트 차이로 앞질렀다.
맥주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달라진 건 물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었다. 1998년, 조선맥주는 회사 이름마저 하이트맥주로 바꿨다. 맥주 회사가 맥주 대신 물의 이름을 골랐고, 그 이름은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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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
- 위키백과 — OB맥주 (1991 페놀 후 점유율 69%→55%)
- 나무위키 — 하이트맥주
- 식품음료신문 — [장수브랜드] 하이트진로 '하이트', 만년 2위서 선두로
- 비즈워치 — [그때 그 광고] 술 회사가 '물 맛'으로 1위 차지한 사연
- 주간경향 — [秘錄 환경운동25년] 거리에 쏟아진 분노의 맥주 거품
- 비즈니스포스트 — [Who Is?] 박문덕 하이트진로그룹 회장 (1991 사장 취임·1993 하이트 출시 주역)
- 한국일보 — [컴퍼니 인사이드] 하이트진로 '물 마케팅' (박문덕·물 마케팅 전략)
- 잡플래닛 컴퍼니타임스 — 오비vs하이트 (1996 하이트 43% vs OB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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