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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차의 얼굴은 이탈리아가 그렸다

1973년 봄, 이탈리아 토리노. 한국에서 온 한 남자가 자동차 디자인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현대자동차의 첫 사장 정세영이었다. 손에 든 건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계획 하나였다. 그런데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이라는 차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디자인은 이탈리아, 엔진은 일본, 핵심 기술자는 영국. 한국이 직접 만든 부분이 어디인지 한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도 포니는 한국 자동차 역사의 첫 줄에 적힌다. 빌려온 조각으로 짜맞춘 차가 어떻게 '국산차 1호'가 됐을까. 빌려 쓰던 나라 1970년대 초, 한국 도로를 달리던 차는 거의 다 빌려온 차였다. 외국 회사의 설계를 들여와 한국에서 조립한 것들이었다. 자동차를 '만든다'기보다 '조립한다'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현대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포드의 코티나를 들여와 울산에서 조립하고 있었다. 현대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려 했다. 포드와 더 깊이 손잡고, 부품을 한국에서 만들고, 합작 회사를 세우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협상은 부품 국산화와 기술 이전의 폭을 놓고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여러 해를 끌던 끝에 합작은 1973년 끝내 깨졌다 . 빌리지 말고, 만든다 포드가 떠난 자리에서 현대는 갈림길에 섰다. 다른 회사의 차를 다시 빌려 조립하느냐, 아니면 현대의 차를 만드느냐. 현대를 세운 정주영은 빌린 차를 조립하는 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고유 모델을 가져본 적 없는 회사가, 만드는 쪽을 택했다. 그 결정을 떠안은 사람이 정주영의 동생이자 현대차 초대 사장이던 정세영 이었다. 정세영이 직접 토리노로 건너간 게 이 무렵이다. 토리노의 이탈디자인에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포니의 얼굴을 맡았다. 설계 도면과 시제품 값으로 치른 돈은 120만 달러 였다. 얼굴은 샀다. 그런데 주지아로의 도면대로 차를 실제로 만들 사람이 현대에는 없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

일본 경찰이 꽃 8만 그루를 태웠다

1933년 겨울, 강원도 홍천 보리울. 산골 학교 뒤편의 작은 묘목밭으로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밭의 묘목을 한 그루도 남기지 않고 뽑아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타 버린 묘목은 8만 그루. 전부 무궁화였다. 애국가 후렴에 박혀 있는, 지금 우리가 나라꽃이라 부르는 그 꽃이다. 묘목을 기른 사람은 일흔 살의 남궁억이었다. 무궁화를 길렀다는 사실이, 그 겨울에는 죄가 되었다. 붓을 내려놓은 자리 꽃을 심은 노인은 본래 산골 사람이 아니었다. 남궁억은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글을 쓰며 살던 사람이었다. 1898년, 남궁억은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이 되었다. 신문은 기울어 가던 나라에서 붓으로 싸우는 자리였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사라졌다. 신문도 글도 더는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1918년, 병을 얻은 남궁억이 강원도 홍천 보리울로 내려왔다. 서울의 붓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노인이 새로 손에 쥔 것은 묘목 한 그루였다. 학비 대신 자란 꽃 1919년 9월, 남궁억은 보리울에 모곡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 교실 뒤에는 묘목밭을 두었다. 밭에서 기른 것은 무궁화였다. 학비를 못 내는 학생과 학부모가 묘목을 길렀고, 묘목을 기른 삯이 학비를 대신했다. 다 자란 묘목은 전국의 학교와 교회로 실려 나갔다. 가난한 산골 학교 한 곳에서 시작한 일이 조선 곳곳으로 번졌다. 나라꽃을 전국에 심겠다는, 노인의 조용한 작정이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꽃이 죄가 된 이유 일제는 무궁화를 가만두지 않았다. 무궁화가 그냥 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국가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에 박힌 꽃이자, 조선을 가리키는 표시였다. 그래서 일제는 꽃 자체를 더럽히는 말을 퍼뜨렸다.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나라꽃 무궁화의 내력 에는, 당시 무궁화에 붙은 별명이 이렇게 적혀 있다. 보기만 해도 ...

목소리는 남고, 범인은 사라졌다

1991년 1월 29일 밤.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던 아홉 살 형호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11시, 형호의 집 전화가 울렸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서른 안팎의 남자 목소리였다. 전화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6일 동안 같은 목소리가 형호의 집으로 쉰 번 넘게 걸려왔다 (집계에 따라 예순 번을 넘겼다는 기록 도 있다). 경찰은 통화를 전부 녹음했다. 그런데도 목소리의 주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한국 범죄사에서 화성 연쇄살인, 개구리 소년 실종과 함께 가장 오래 풀리지 않은 사건으로 남은 이름 — 이형호 유괴 살해 사건 이다. 1991년, 쫓을 수 없던 시대 첫 전화에서 남자가 부른 것은 현금 7천만 원과 카폰이 달린 자동차 였다. 1991년 서울에서 7천만 원은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에 가까웠고, 차에 다는 카폰은 부유함의 상징이던 시절이다. 형호의 부모는 시키는 대로 돈을 마련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잡을 방법이었다. 1991년 한국에는 금융실명제가 없었다. 누구나 가짜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 수 있었고, 통장을 쥐고 있어도 주인을 거슬러 올라갈 길이 없었다. 은행 안에 카메라도 거의 없었다. 범인이 돈을 찾으려 한 두 곳의 은행 지점에는 CCTV가 한 대도 없었다 . 가짜 이름 통장이 가능했고, 은행에는 CCTV가 없었고, 범인이 현장에 남긴 물증은 없었다. 범인은 공중전화로만 전화를 걸었다. 발신지를 따라가도 길에 선 전화 부스 한 대가 나올 뿐이었다. 협박 메모를 열 차례 넘게 남겼지만 거기서도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손에 쥔 단서는 단 하나, 쉰 번 넘게 녹음된 목소리뿐이었다. 양화대교의 밤 범인이 돈을 받을 자리를 정했다. 양화대교 남단 둔치. 돈을 가져다 두라고 했다. 경찰은 덫을 놨다. 진짜 돈 얼마에 위조지폐 뭉치를 섞어 두고, 다리 주변 어둠 속에 형사들을 잠복시켰다. 형호의 부모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아이를 돌려받기 위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 다리에 깔...

가라앉는 배 위에서 악단은 연주했다

월리스 하틀리는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있었다. 발밑 갑판은 이미 뱃머리 쪽으로 기울고, 사람들은 구명보트 줄로 몰려갔다. 1912년 4월 15일 새벽, 북대서양 한가운데였다. 하틀리 옆에서 일곱 사람이 함께 악기를 들고 있었다. 여덟 명은 그 새벽을 넘기지 못했다. 타이타닉에서 끝까지 연주한 악단 이야기는 워낙 알려져 있다. 침착한 신사들이 음악으로 가라앉는 배 위 사람들을 달랬다는 그림. 그런데 이 여덟 명이 누구였는지를 따라가 보면, 익숙한 그림 뒤에 덜 알려진 사정이 몇 겹 깔려 있다. 처녀항해, 두 팀이 한 배에 올랐다 월리스 하틀리 는 1878년 잉글랜드 북부 콜른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집안에서 자란 바이올리니스트로, 한 배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에서 배로 옮겨 다니며 악단을 이끌었고, 타이타닉은 그가 일하게 된 여러 큰 배 가운데 하나가 될 예정이었다. 타이타닉은 그때까지 만들어진 가장 큰 여객선이었고, 1912년 4월 10일 사우샘프턴에서 첫 항해를 시작했다. 배에 오른 음악대는 모두 여덟 명이었다. 원래는 따로 움직이던 두 팀 이었다 — 식당과 라운지에서 연주하던 다섯 명, 별도의 식당에서 연주하던 세 명. 두 팀은 평소 같이 연주하지 않았다. 한 배에 함께 오르면서 비로소 여덟 명이 한 악단이 되었다. 빙산이 스친 뒤, 악단은 갑판으로 옮겼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타이타닉이 빙산을 긁고 지나갔다. 충돌 30분쯤 뒤, 악단은 1등실 라운지로 불려 갔다. 동요하는 승객을 달래라는 뜻이었다. 구명보트가 한 척씩 내려지는 동안, 악단은 라운지에서 갑판 입구 쪽으로 자리를 옮겨 연주를 이어 갔다. 그 사이 갑판 위 사정은 빠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타이타닉에 실린 구명보트는 스무 척, 정원을 다 채워도 배에 탄 사람의 절반쯤만 태울 수 있었다. 악사들은 보트 줄에 서는 대신 갑판에 남아 악기를 들고 있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

철판 한 장으로 덮었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38분. 서울 성수대교 위로는 출근하는 차와 등교하는 학생들이 뒤섞여 있었다. 무학여고 학생들을 태운 16번 시내버스도 그 위에 있었다. 다리 한가운데, 제10번과 11번 교각 사이의 상판 48미터 가 한순간에 끊어져 20미터 아래 한강으로 떨어졌다. 차 여섯 대가 함께 빠졌다. 이 사고로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 지은 지 15년 밖에 안 된 다리였다. 사람들은 처음에 다리가 낡아서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5년 된 다리는 낡은 다리가 아니다. 멀쩡해 보이던 다리가 출근길 한복판에서 끊어진 이유는, 세월보다 훨씬 사람의 손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날렵하게 짓고 싶었던 다리 성수대교는 1977년에 착공해 1979년 10월 동아건설이 완공했다. 한강에 놓인 다리 가운데 처음으로 거버 트러스라는 공법 을 썼다. 다리를 더 날씬하고 보기 좋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튼튼함보다 미관을 앞세운 선택 이었다. 거버 트러스는 부재 하나하나가 서로를 받치는 구조다. 계산이 간단하고 모양이 우아한 대신, 약점이 하나 있었다. 핵심 부재 하나가 끊어지면 그 무게를 나눠 받을 곳이 없어 전체가 함께 내려앉는다. 우아함과 위태로움이 같은 설계 안에 들어 있었다. 다리는 멀쩡하거나, 아니면 통째로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다리가 놓일 때 강남은 아직 논밭에 가까웠다. 설계는 하루 차량 8만 대를 견디도록 잡혔고, 1979년의 교통량에는 넉넉한 숫자였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두 배가 된 무게 1993년, 동부간선도로 성수~상계 구간이 뚫렸다. 강남이 커지면서 다리를 건너는 차가 빠르게 늘었다. 설계 기준이 하루 8만 대였는데, 1994년에는 하루 16만 대 가 다리를 밟고 지나갔다. 견디기로 한 무게의 두 배가 매일 다리를 짓눌렀다. 여기서 앞 장의 부실한 용접이 문제가 된다. 한 번에 끊어질 정도는 아니어도, 약하게 박힌 용접 자리에 매일 두 배의 무게가 실리면 금속에는 눈에 안 보이는 미세한 균열이 자란다. ...

다음 임금의 어머니가 사약을 받았다

1482년 8월, 한양의 한 사가. 마당에 사약 한 사발이 놓였다. 사발 앞에 앉은 여자는 삼 년 전까지 이 나라의 왕비였다. 그리고 윤씨가 낳은 다섯 살 아들은, 다음 임금이 될 세자였다. 왕비가 폐위되는 일도 드물었다. 폐위된 왕비에게 사약이 내리는 일은 더 드물었다. 그런데 사약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 임금 성종이었다. 훗날 연산군이 되는 다섯 살 아이의 친아버지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게 자격이 된 여자 폐비 윤씨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 윤기견은 윤씨가 궁에 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집안에는 내세울 권세도 재산도 없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 1473년, 성종이 후궁을 들였다. 윤씨가 숙의로 뽑혔다. 뽑힌 까닭 가운데 하나가, 역설적이게도 든든한 친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외척이 설칠 걱정이 없는 여자 라는 이유로, 궁은 윤씨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성종은 열세 살에 임금이 됐다. 어린 임금 뒤에는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고, 조정은 한명회 같은 훈구 대신들의 손안에 있었다. 성종의 첫 왕비 공혜왕후가 바로 그 한명회의 딸이었다 . 1474년 공혜왕후가 자식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 왕비 자리가 비자, 성종은 권세 큰 집안의 딸을 다시 들이는 대신 반대쪽으로 갔다. 가진 것 없는 여자였다. 1476년, 윤씨가 성종의 아이를 가졌다. 같은 해 윤씨는 숙의에서 곧바로 왕비에 올랐고, 아들 융을 낳았다. 가진 것 없던 집 딸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다. 왕비의 자리는 임금의 마음 하나에 매여 있었다 궁에는 임금의 여자가 많았다. 왕비라는 자리도 결국 임금의 마음 하나에 매여 있었다. 윤씨는 그 자리를 지키려 했고, 후궁들과 자주 부딪쳤다. 가진 것 없이 자라 처음으로 손에 쥔 자리였다. 자리를 놓으면 돌아갈 곳은 다시 가난한 친정뿐이었다. 1477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이 나왔다. 후궁들을 해치려 했다는 혐의가 붙었다. 윤씨가 정말 독을 쓰려 했는지, 누군가의 모함...

퀴리의 공책은 납에 갇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하. 한 연구자가 장갑을 끼고 각서에 서명을 한다. 보호장비를 갖춘 다음에야 상자가 열린다. 안에 든 것은 낡은 공책 한 권. 마지막으로 글씨가 적힌 것은 90여 년 전이다. 그래도 공책에서는 아직 방사선이 나온다. 공책의 주인은 마리 퀴리다. 화학 노트였다.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맨손으로는 넘길 수 없다 . 왜 한 사람의 공책이 한 세기가 지나도록 위험할까. 답은 마리 퀴리가 평생 쫓은 가루 한 줌에 있다. 빛나는 가루를 쫓은 사람 1898년 파리. 비가 새는 낡은 창고에서 두 사람이 우라늄 광석을 끓였다. 한 사람은 피에르 퀴리, 다른 한 사람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온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 곧 마리 퀴리였다. 마리 퀴리가 떠나온 폴란드는 그때 지도에 없었다.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나라를 셋으로 갈라 가진 지 100년이 넘던 때였다. 두 사람은 그해 새로운 원소 둘을 세상에 알렸다 . 하나는 폴로늄. 마리 퀴리가 지도에서 사라진 조국의 이름을 붙였다. 다른 하나가 라듐이었다. 라듐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희미하게 빛났다. 라듐을 손에 쥐는 일은 쉽지 않았다. 광석을 수 톤씩 끓여야 가루 한 줌이 나왔다. 흔히 "퀴리가 라듐 0.1그램을 건졌다"고 하지만, 좀 더 정확히는 1902년에 염화라듐 0.1그램을 분리 한 것이었다. 순수한 라듐 금속을 손에 넣은 것은 다시 8년이 지난 1910년이다. 몇 해 동안 끓인 광석에서 남은 것이 그만큼이었다. 요정의 불빛 라듐을 손에 넣은 마리 퀴리는 라듐을 곁에서 떼지 않았다. 라듐을 담은 시험관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책상 서랍에도 두었다 . 밤이 되면 작업실로 갔다. 선반 위에 늘어선 시험관들이 스스로 푸르스름하게 빛을 냈다. 밤에 작업실에 들어가면 사방에서 시험관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빛나는 시험관들은 마치 요정의 불빛 같았다. 이 문장은 마리 퀴리가 1923년에 쓴 남편 피에르의 전기에 남아 있다 . 마리 퀴리는 라듐을 곁에 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