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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3만 권이 불보다 먼저 나갔다

2003년 봄, 이라크 바스라. 알리아 베이커는 저녁마다 자기 차에 책을 실었다. 도서관 관장이 퇴근길에 하는 일 치고는 낯선 풍경이었다. 바스라 중앙도서관에서 일한 지 열네 해, 베이커는 서가에 꽂힌 책들이 머지않아 불에 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전쟁이 항구도시로 내려오던 봄 2003년 3월, 전쟁이 이라크 남부로 밀려 내려왔다. 바스라는 항구도시였고, 하필 연합군의 진격로 위에 놓여 있었다. 베이커의 걱정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었다. 같은 봄, 바그다드에서는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하고 국립도서관과 문서보관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수천 년의 기록이 며칠 사이에 재가 되고 있었다. 바스라에서 서가를 지키던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린 장면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베이커는 바스라 중앙도서관에서만 열네 해를 일한 사람 이었다. 베이커는 책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게 해달라고 당국에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안 된다"였다. 밤마다, 차 한 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 사무실들이 도서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옥상에는 대공포가 한 대 올라갔다. 도서관은 이제 지도 위의 표적이 되었다. 당국이 책을 옮기지 않는 이상, 남은 사람은 관장 한 명뿐이었다. 베이커는 움직이기로 했다. 매일 저녁 퇴근길에, 차에 실리는 만큼 책을 실어 집으로 날랐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물음에, 베이커는 코란의 한 구절로 답했다. 이슬람 전승에서 신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처음 건넨 말씀은 '읽어라'였다고 전해진다. 서가를 지키려는 사람에게 그 한 단어보다 곧은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신이 무함마드에게 처음 건넨 말씀은 '읽어라'였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담장 하나를 넘어간 3만 권 차 한 대로는 어림없었다. 장서는 수만 권이었고, 전선은 도시로 다가오고 있었다. 베이커는 도서관 바로 옆 함단 식당으로 갔다. 주인 아니스 무함마드에...

기독교에서 가장 거룩한 문은 무슬림이 연다

새벽 4시 무렵, 예루살렘 구시가. 아디브 주데가 돌 골목을 걸었다. 손에는 쇠열쇠 하나가 들려 있었다. 골목 끝에는 예수 무덤 성당의 정문이 있다. 기독교에서 가장 거룩하다는 문이다. 문 앞에서 주데는 열쇠를 와지 누세이베에게 건넸다. 주데도 무슬림이고, 누세이베도 무슬림이다. 예수 무덤 성당은 여섯 교파가 나눠 갖고 있는 건물 인데, 여섯 교파 가운데 문 열쇠를 쥔 교파는 하나도 없다. 한 지붕 아래 여섯 주인이 산다 예수 무덤 성당은 골고다 언덕과 예수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자리를 한 지붕 안에 넣은 건물이다.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트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여섯 교파가 성당 한 채를 나눠 쓴다. 기둥 하나, 촛대 하나, 계단 한 칸까지 어느 교파 몫인지 정해져 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아예 성당 지붕 위에 자리를 잡고 산다. 몫을 이렇게까지 쪼개 둔 근거는 오스만 제국의 칙령이다. 1757년 술탄 오스만 3세가 성당 안의 것을 지금 있는 그대로 두라고 명했고, 1852년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다시 못을 박았다 . 여섯 교파가 전부 동의하지 않으면 성당 안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현상유지라고 부르는 원칙이다. 성당 정면 창턱에는 나무 사다리 한 개가 놓여 있다. 아무도 쓰지 않는 사다리다. 치우려면 여섯 교파가 모두 동의해야 하고, 동의는 나오지 않는다. 흔히 1757년 현상유지가 사다리를 묶어 놓았다고들 하는데, 순서는 반대에 가깝다. 사다리는 늦어도 1728년 판화에 이미 같은 창턱에 그려져 있다 . 현상유지보다 사다리가 먼저였고, 현상유지가 사다리를 그 자리에 얼려 버렸다. 사다리가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는 말도 정확하지는 않다. 1997년에 관광객 한 명이 사다리를 성당 안에 숨겨 놓았다고 전한다. 사다리는 같은 창턱으로 돌아왔다. 못 옮기는 물건이라기보다, 옮겨도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물건이다. 1187년, 열쇠가 성당 밖으로 나갔다 열쇠가 성당 밖...

베네치아는 내려가고 인천은 올라섰다

2019년 11월 12일 밤,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바닷물이 187cm 밀려들었다. 산마르코 광장은 베네치아에서 땅이 가장 낮은 곳이다. 도시가 잠길 때 가장 먼저 잠기고, 가장 늦게 마른다. 그날 밤 도시의 80%가 물속에 있었고, 산마르코 대성당 안으로도 물이 들어왔다 . 베네치아 사람들은 밀려드는 바닷물을 아쿠아 알타(acqua alta) , '높은 물'이라 부른다. 187cm는 반세기 만에 가장 높은 물이었다. 이보다 높았던 건 딱 한 번, 1966년 11월의 194cm 뿐이다. 그사이 산마르코 광장이 물에 잠기는 날은 어느새 1년에 200번을 넘어섰다. 물 위에 세운 도시 베네치아는 처음부터 물 위의 도시였다. 5세기 무렵, 내륙 사람들이 밀려오는 이민족을 피해 석호 한가운데 진흙 섬으로 숨어들었다. 땅이라 부를 것도 없는 갯벌이었다. 사람들이 택한 방법은 갯벌에 나무 말뚝을 박는 것이었다. 수백만 개를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널판을 깔고, 다시 돌을 얹었다. 지금 산마르코 대성당과 리알토 다리가 서 있는 자리도 이 말뚝 위다. 나무를 물에 담그면 썩는다. 그런데 진흙 깊이 박힌 말뚝은 썩지 않았다. 진흙 아래에는 산소가 닿지 않아, 나무를 썩히는 미생물이 살지 못한다. 산소가 없는 진흙 속에서 나무는 되레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갔다. 1500년 전에 박은 말뚝이 지금도 도시를 떠받치고 있다. 도시가 스스로 땅을 눌러 내렸다 물 위에 얹힌 도시가 흔들린 건 20세기 들어서였다. 베네치아 옆 육지에 마르게라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공장들이 땅속 지하수를 퍼올리기 시작했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은 스스로 눌려 내려앉았다. 1950년부터 1970년까지 스무 해 사이, 베네치아는 약 10cm 내려앉았다 . 도시가 낮아진 만큼 바닷물은 더 쉽게 광장을 넘었다. 앞서 말한 1966년의 194cm 대홍수도 땅이 가장 많이 꺼진 이 시기의 끝에 왔다. 1960년대 말, 베네치아가 지하수 뽑기를 멈췄다. 땅 꺼짐은 느려...

마지막 줄은 추위 얘기가 아니었다

1912년 11월 12일, 남극. 눈에 반쯤 파묻힌 텐트 하나를 수색대가 찾아냈다. 안에는 세 남자가 얼어 있었고, 침낭 사이에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식량이 쌓인 창고까지는 18km , 날이 좋았다면 하루면 닿을 거리였다. 노트의 마지막 줄은 추위 얘기가 아니었다. 얼어 죽어 가던 대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이 무엇이었는지는, 그가 걸어온 길을 처음부터 되짚어야 보인다. 지도의 마지막 빈칸 1911년의 세계 지도에는 사람 발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땅이 딱 한 곳 남아 있었다. 남극점. 북극점은 이미 도달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온 뒤였고, 지구에서 '처음'이라는 이름이 아직 안 붙은 자리는 그 하얀 한 점뿐이었다. 이 무렵 유럽 각국은 극지에 사람과 깃발을 보내는 일에 국가의 위신을 걸었고, 뒷날 사람들은 이 시기를 '남극 탐험의 영웅시대'라고 불렀다. 영국 해군 장교 로버트 팰컨 스콧 은 그 자리에 처음 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구의 맨 끝에 대영제국의 깃발을 꽂는 일이었다. 같은 해,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도 뱃머리를 남극으로 돌렸다. 하나의 점을 두고 두 팀이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고른 방법은 갈렸다. 스콧은 조랑말과, 사람이 직접 몸으로 끄는 썰매를 택했다. 아문센은 개썰매에 모든 걸 걸었다. 뒷날 이 선택은 승패를 가른 결정으로 두고두고 이야기됐다. 눈밭에서 조랑말은 땀이 얼어붙어 쉬 지쳤고, 개는 그렇지 않았다. 먼저 온 깃발 1912년 1월 17일, 스콧과 대원 네 명이 남극점에 섰다. 남극점을 향해 떠난 지 77일 만이었다. 그런데 새하얀 벌판 한가운데 검은 점 하나가 보였다. 다가가 보니 텐트였다. 노르웨이 국기가 꽂혀 있었고, 노르웨이 왕에게 전해 달라는 편지 한 통이 남겨져 있었다. 아문센이 남극점을 밟은 날은 1911년 12월 14일 . 스콧 일행은 꼭 34일이 늦었다. 맙소사. 여기는 끔찍한 곳이다. 죽도록 애써 왔건만 첫 번째라는 상(賞)조차 없구나. 스콧이 그...

스콧은 달에서 거짓말을 했다

1971년 8월 2일, 달 헤들리 골짜기. 데이비드 스콧이 장갑 낀 손으로 흙 위에 8.9센티미터짜리 알루미늄 인형 하나를 눕혔다. 우주복을 입은 사람 모양이었다. 인형 옆엔 손바닥만 한 금속판도 함께 내려놓았다. 스콧은 그것이 무엇인지 교신에서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다. 달에 무엇을 남겼는지는, 지구로 돌아와 기자회견 자리에 선 뒤에야 입에 올렸다. 경쟁이 가장 뜨겁던 해 1971년의 우주는 전선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누가 먼저, 더 멀리 가느냐로 체제의 자존심을 걸었다. 아폴로 15호는 그 경쟁의 한복판에서 올라간 배였다. 사람이 달에서 처음으로 차를 몬 임무이기도 했다 — 스콧과 동료는 월면차를 타고 골짜기를 누볐고, 인형은 그 차에서 멀지 않은 흙 위에 놓였다. 발사 전, 스콧은 벨기에 화가 폴 반 후이동크와 저녁 자리에서 약속을 하나 했다. 달에 두고 올 작은 조각을 만들기로. 조각엔 조건이 붙었다. 가볍지만 단단할 것, 달의 극한 더위와 추위를 견딜 것, 남자도 여자도 아닐 것, 어느 나라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을 것. 우주를 향하다 죽은 누구든 그 인형이 될 수 있도록. 소유즈 11호의 세 사람 아폴로 15호 발사를 한 달쯤 앞둔 6월 30일, 소련 우주선 소유즈 11호가 지구로 내려왔다. 낙하산이 펴지고, 회수팀이 캡슐 문을 열었다. 세 사람이 안전벨트를 맨 채 자리에 숨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밸브 하나가 잘못 열려, 1분도 안 되는 사이 캡슐의 공기가 우주로 빠져나간 것이었다 . 고도 약 130킬로미터, 대기 밖이었다. 게오르기 도브로볼스키, 블라디슬라프 볼코프, 빅토르 파차예프 — 지금까지도 우주 공간 그 자체에서 죽은 유일한 사람들이다. 스콧은 소유즈 11호의 죽음을 알고 달로 떠났다. 금속판엔 우주를 향하다 죽은 열네 사람의 이름이 새겨졌다. 미국 우주인 여덟, 소련 우주인 여섯. 며칠 전 숨진 소유즈 11호의 세 사람도 그 안에 있었다. 적국의 갓 죽은 우주인을, 자기 나라 사람들과 같은 판에 올린 것이다. 나...

리초만 알아들었다

2020년 4월 4일, 인도 안다만 제도의 포트블레어. 리초라는 여자가 숨을 거뒀다. 리초가 떠나자, 책장에 사전이 한 권 멀쩡히 꽂혀 있는데도 다시는 되살릴 수 없는 것이 하나 남았다. 사레어를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리초는 그레이트 안다만 부족의 언어, 사레어를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사전은 있었다. 문법서도, 노래를 묶은 책도 있었다. 그런데도 언어가 끝났다고 말하는 이유는, 종이에 적히지 않는 무언가가 리초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섬에 5천 명이 살았다 그레이트 안다만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떠난 첫 인류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생존 국제연대(Survival International) 는 이들을 약 7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갈라져 나온 무리의 자손으로 본다. 어느 쪽이든, 안다만 제도의 섬에서 수만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1858년, 영국이 포트블레어에 형무소를 세우며 섬으로 들어왔다. 그 무렵 그레이트 안다만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를 두고는 기록이 갈린다. 생존 국제연대는 약 5천 명으로 적고, 다른 추정 은 3천5백 명 안팎을 말한다. 다만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갈리지 않는다. 처음엔 충돌로, 곧이어 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폐렴, 홍역, 매독. 면역이 없는 병이었다. 1961년, 섬에 남은 그레이트 안다만 사람은 19명 이었다. 리초는 줄어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지라케는 부족의 왕이라 불렸고, 리초는 지라케의 첫 아이였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2000년, 언어학자가 찾아왔다 2000년 무렵, 언어학자 안비타 아비가 안다만 제도에 닿았다. 사라져 가는 그레이트 안다만 말을 기록하러 온 사람이었다. 받아 적으려면, 입으로 말을 불러 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리초가 그 일을 맡았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소리 내어 불러 주는 일이었다. 한 번에 끝...

체르노빌의 셋은 죽지 않았다

1986년 5월, 체르노빌. 세 남자가 잠수복을 입고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원자로 4호기 아래로 내려갔다. 발밑은 물이 고인 캄캄한 지하였고, 머리 위로는 녹아내린 핵연료가 언제 흘러내릴지 모르는 자리였다. 밖에서 기다리던 동료들은 그 길을 자살 임무라 불렀다. 살아서 나온다는 약속을,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다. 아나넨코, 베스팔로프, 바라노프. 세 사람은 흔히 체르노빌의 잠수부 로 불린다. 유럽을 구하고 며칠 만에 방사능으로 숨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런데 그 이야기는, 이름부터가 사실과 어긋나 있다. 아흐레 전, 무엇이 무너졌나 1986년 4월 26일 새벽, 안전 시험을 하던 4호기가 폭발했다. 흑연이 불탔고, 도시 프리피야트의 주민들은 며칠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일상을 보냈다. 소련이 원자력을 국가의 자부심으로 내세우던 시절이었다. 불을 끄려고 쏟아부은 물과 원자로에서 새어 나온 냉각수는 갈 곳을 잃고 원자로 바로 아래 지하 수조로 흘러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약 2만 톤에 이르는 물 이 그 아래 고였다. 문제는 위에서 천천히 녹아 흘러내리던 핵연료 덩어리였다. 1,000도가 넘는 그것이 고인 물에 닿으면 순간적으로 거대한 증기가 발생해 2차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당시 과학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건, 그 2차 폭발이 1차 폭발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오염시키리라는 점이었다. 막을 방법은 단순하면서도 끔찍했다. 지하의 배수 밸브를 사람 손으로 직접 여는 것. 그 밸브는 방사능이 가득 찬 지하 미로 끝에 있었다. 밸브를 아는 사람 누가 내려갈 것인가. 답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그 지하의 배수 밸브가 어디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기계 기술자 아나넨코였기 때문이다. 길을 아는 사람이 가지 않으면, 다른 누가 가도 캄캄한 미로에서 헤맬 뿐이었다. 아나넨코가 앞장서 밸브 위치를 안내하고, 선임 기술자 베스팔로프가 또 하나의 밸브를 맡았다. 당직 책임자였던 바라노프는 손전등으로 두 사람의 뒤를 비추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