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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ly, 2026

배우가 어뢰 특허를 냈다

1942년 8월 11일, 미국 특허청이 특허 2,292,387번을 등록했다. 제목은 '비밀 통신 시스템'. 발명자 칸에는 이름이 둘 적혀 있었다. 조지 안타일, 그리고 헤디 키슬러 마키. 뒤의 이름은 같은 해 미국 극장 간판에도 걸려 있었다. MGM 배우 헤디 라마. 빈의 저녁 식탁 헤디 라마는 1914년 11월 9일 빈에서 태어났다 . 본명은 헤드비히 키슬러. 유럽에서 이름이 먼저 알려졌고, 열여덟이던 1933년 8월 빈 카를 성당에서 무기 제조업자 프리드리히 만들과 결혼했다 . 만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손꼽히는 탄약 사업가였고, 파시즘 진영과 거래하는 쪽 이었다. 저택에는 저녁마다 군인과 기술자가 모였다. 화제는 늘 무기였다. 어뢰, 유도 장치, 통신 교란. 열여덟 살 신부는 식탁 끝에 앉아 오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1930년대 유럽에서 무선 조종 어뢰는 최신 무기였고, 약점도 분명했다. 조종 신호의 주파수를 적이 찾아내 흔들면 어뢰는 그대로 빗나갔다. 1937년, 라마는 빈을 떠났다. 다만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하녀에게 약을 먹이고 옷을 바꿔 입고 나왔다는 극적인 탈출담은 1966년에 나온 자서전에 실린 이야기이고, 라마 본인이 뒷날 자서전 내용을 부인했다. 출처가 확실히 뒷받침하는 건 여기까지다. 1937년 라마는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MGM의 루이스 B. 메이어를 만나 계약했다 . 미국으로 가는 배는 노르망디호였다. 배에서 내렸을 때 이름은 헤디 라마로 바뀌어 있었다. 라마가 빈을 떠난 이듬해인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됐다. 라마의 부모는 유대인이었다. 1940년 9월 17일, 대서양 1940년 가을, 미국은 아직 전쟁에 뛰어들기 전이었다. 할리우드에서 라마는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축에 들었다. 9월 17일, 영국 여객선 시티 오브 베나레스호가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대서양에 가라앉았다 . 배에는 공습을 피해 캐나다로 보내지던 아이들이 타고 있었고, 대다수가 돌아오지 못했...

책 3만 권이 불보다 먼저 나갔다

2003년 봄, 이라크 바스라. 알리아 베이커는 저녁마다 자기 차에 책을 실었다. 도서관 관장이 퇴근길에 하는 일 치고는 낯선 풍경이었다. 바스라 중앙도서관에서 일한 지 열네 해, 베이커는 서가에 꽂힌 책들이 머지않아 불에 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전쟁이 항구도시로 내려오던 봄 2003년 3월, 전쟁이 이라크 남부로 밀려 내려왔다. 바스라는 항구도시였고, 하필 연합군의 진격로 위에 놓여 있었다. 베이커의 걱정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었다. 같은 봄, 바그다드에서는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하고 국립도서관과 문서보관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수천 년의 기록이 며칠 사이에 재가 되고 있었다. 바스라에서 서가를 지키던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린 장면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베이커는 바스라 중앙도서관에서만 열네 해를 일한 사람 이었다. 베이커는 책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게 해달라고 당국에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안 된다"였다. 밤마다, 차 한 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 사무실들이 도서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옥상에는 대공포가 한 대 올라갔다. 도서관은 이제 지도 위의 표적이 되었다. 당국이 책을 옮기지 않는 이상, 남은 사람은 관장 한 명뿐이었다. 베이커는 움직이기로 했다. 매일 저녁 퇴근길에, 차에 실리는 만큼 책을 실어 집으로 날랐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물음에, 베이커는 코란의 한 구절로 답했다. 이슬람 전승에서 신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처음 건넨 말씀은 '읽어라'였다고 전해진다. 서가를 지키려는 사람에게 그 한 단어보다 곧은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신이 무함마드에게 처음 건넨 말씀은 '읽어라'였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담장 하나를 넘어간 3만 권 차 한 대로는 어림없었다. 장서는 수만 권이었고, 전선은 도시로 다가오고 있었다. 베이커는 도서관 바로 옆 함단 식당으로 갔다. 주인 아니스 무함마드에...

배는 무사했다, 사람만 빼고

1872년 12월 5일, 아조레스 제도에서 동쪽으로 740킬로미터쯤 떨어진 대서양. 영국 배 데이 그라티아호의 선원들이 낯선 광경을 봤다. 돛을 일부 편 채,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홀로 흔들리는 배 한 척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올라선 배의 이름은 메리 셀레스트호였다. 선실에는 세간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선창에는 여섯 달 치 식량과 물이 실려 있었다. 화물도 온전했다. 사라진 것은 단 두 가지, 배에 탔던 열 사람과 구명보트 한 척뿐이었다. 남은 기록 앞에 질문은 하나였다. 왜 열 사람이 멀쩡한 배를 두고 사라졌나. 바다에 홀로 뜬 배 배에 가장 먼저 오른 사람은 데이 그라티아호의 일등항해사 올리버 드보 였다. 드보가 갑판에서 확인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배는 물이 새고 있었지만 가라앉을 정도는 아니었고, 조타 장치와 돛 대부분이 멀쩡했다. 선창에 물이 무릎 높이쯤 차 있었으나, 그 물은 배를 위협할 양이 아니었다. 없어진 것은 사람과 보트였다. 갑판 위에는, 배가 발견되기 직전까지 누군가 선창의 물 높이를 재던 막대가 놓여 있었다. 서둘러 배를 버리고 달아난 자리라기엔, 배는 너무 정돈되어 있었다. 값나가는 세간과 선원들의 옷가지, 심지어 선장의 항해 도구 일부까지 그대로였다. 가족을 배에 태운 선장 한 달 전으로 거슬러 간다. 1872년 11월 7일, 뉴욕항. 배의 선장은 벤저민 브릭스, 열 해 넘게 대서양을 오간 뱃사람이었다. 술을 멀리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듣던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 브릭스는 혼자 떠나지 않았다. 아내 세라와 두 살 난 딸 소피아를 함께 태웠다. 긴 바닷길에 어린 가족을 올린다는 건, 그 항해를 그만큼 믿었다는 뜻이었다. 브릭스에게 이 배는 일터이자, 아내와 아이가 함께 잠드는 집이기도 했다. 배 밑 화물칸에는 제노바로 갈 공업용 알코올 1,701통 이 실려 있었다. 출항 전, 브릭스가 뉴욕의 애스터하우스에서 다른 선장과 저녁을 함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주 앉았다는 사람은 데이비드 모어하우스, ...

미군 드럼통이 차가 되었다

1955년, 서울 종로의 한 정비소. 정비공 최무성과 두 동생이 미군이 버리고 간 드럼통을 망치로 두드려 폈다. 둥글게 말린 기름통이 판판하게 펴지자, 그 철판이 자동차의 옆판이 됐다. 엔진은 미군 지프에서 떼어내 되살렸다. 시중에 없는 부품은 공작기계로 하나씩 깎았고, 도면이라 할 것도 변변찮았다. 그렇게 넉 달 을 두드려 차 한 대가 나왔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람 손으로 만들어낸 자동차, 이름은 ‘시발(始發)’이었다. 차를 만드는 나라가 아니었다 1955년의 한국에는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이 없었다. 전쟁이 멈춘 지 두 해, 거리를 굴러다니는 차는 대개 미군이 쓰다 버린 지프였다. 고장 난 지프가 오면 고쳐서 다시 굴렸고, 버려진 드럼통은 지붕이 되고 담장이 되고 밥그릇이 됐다. 남는 것을 되살려 쓰는 일이 그 시절의 산업이었다. 최무성은 종로에서 바로 그 미군 지프를 고치는 정비소를 했다. 뜯고 맞추기를 여러 해 반복하는 사이, 부품 하나하나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손끝에 익었다. 고치는 일이 쌓이자 머릿속에 다른 그림이 생겼다. 엔진을 되살리고 껍데기를 새로 만들면, 남의 차가 아니라 자기 차 한 대가 통째로 나온다. 정비소가 공장이 되다 1955년, 최무성은 두 동생 최혜성·최순성과 함께 정비소 문을 자동차 공장으로 바꿨다. 회사 이름은 국제차량제작 . 남의 차를 고치던 자리에서 자기 차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가장 큰 벽은 철판이었다. 몸체를 찍어낼 철판이 없으니, 삼형제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구해다 망치로 펴서 옆판을 만들었다. 지프에서 떼어낸 엔진과 변속기를 되살려 얹고, 실린더 헤드처럼 시중에 없는 부품은 공작기계로 깎았다. 이렇게 손으로 두드려 한 대를 완성하는 데 넉 달이 걸렸다. 완성된 차에 삼형제는 ‘시발’이라 이름 붙였다. 始發, 첫 출발이라는 뜻이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쌤 1인 과외 학생관리 · 메모 한 줄로 수업료 청구 자동 생성 ▶ Google Pl...

밟고 가라, 추기경이 말했다

1987년 6월 12일, 밤이 깊은 시각. 정부 당국자 한 사람이 서울 명동성당 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성당에는 경찰에 쫓겨 온 학생 수백 명이 사흘째 갇혀 있었다. 당국자가 전하러 온 말은 하나였다. 성당에 병력을 들여보내 학생들을 끌어내겠다는 통보였다. 통보를 받은 사람은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이었다. 그는 잠시 뒤 답을 내놓았다. 돌아가서 한 마디도 빼지 말고 그대로 옮기라고 했다. 그 대답이 이후 엿새를 갈랐다. 성당 밖의 1987년 학생 수백 명이 왜 성당으로 뛰어들었는지 이해하려면, 그해의 공기를 먼저 알아야 한다. 1987년의 한국에서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했다. 대통령은 선거인단이 뽑았고, 그해 4월 전두환 정부는 그 방식을 그대로 두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 조치 를 발표했다. 김수환을 비롯한 종교계와 지식인들은 곧바로 반대 성명을 냈다. 불씨는 그전에 이미 있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를 받다 숨졌다.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고 발표했지만, 실제 사인은 물고문이었다. 그 사실이 1월 중순 드러나면서, 정부 발표를 믿는 사람은 남지 않았다. 6월 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고,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다음 날인 6월 10일, 시민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경찰에 밀린 대열의 일부가 흘러든 곳이 명동성당이었다. 학생들은 성당을 목적지로 삼은 것이 아니라, 밀리다 그곳에 닿았다. 6월 11일 새벽부터 철야 농성이 시작됐다. 밟고 가라 성당의 주인은 김수환이었다. 그는 1969년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오른 사람이자, 두 달 전 호헌 조치를 정면으로 비판한 사람이었다. 정부로서는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상대였지만, 성당 안 농성이 길어지자 결국 병력 투입 카드를 꺼냈다. 6월 12일 밤의 은밀한 방문이 그 통보였다. 그 통보에 김수환이 돌려보낸 말은 지금 민주화운동 기록으로...

'케이크를 먹어라'는 가짜였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이름 옆에는 늘 이 한마디가 붙어 다닌다. 굶는 백성 앞에서 케이크를 권한 철없는 왕비. 이백 년 넘게 한 사람을 설명해 온 문장이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생 이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더 이상한 건, 그녀가 사형대에서 실제로 남긴 마지막 말이 전혀 다른 종류의 문장이었다는 사실이다. 가짜가 된 한마디와, 기록에 남은 진짜 한마디. 그 사이에 한 사람의 삶이 있다. 케이크는 브리오슈였고, 공주는 아홉 살이었다 케이크 이야기가 처음 종이에 적힌 곳은 장자크 루소의 회고록 『고백록』이다. '어느 위대한 공주'가 이렇게 말했다고만 적혀 있을 뿐, 이름은 없었다 . 원문의 단어도 케이크가 아니라 브리오슈, 버터와 달걀을 넣어 구운 빵이었다. 값싼 빵이 떨어졌으니 비싼 빵을 먹으라는,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였다. 문제는 시점이다. 루소가 이 대목을 쓴 1765년 무렵,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홉 살이었다. 프랑스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빈의 궁전에 살았고, 프랑스로 시집오기 다섯 해 전이었다. 빈의 아홉 살 소녀가 파리의 빵값을 두고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이름이 이 문장에 확실히 들러붙은 것은 앙투아네트가 죽고 한참 지난 뒤였다는 게 지금은 정설로 통한다 . 주인 없이 떠돌던 옛 이야기가, 뒤늦게 한 사람의 이름을 얻은 셈이다. 빈에서 온 신부에게 붙은 이름 1770년 5월 16일, 베르사유. 빈에서 온 열네 살 소녀가 결혼식장에 섰다. 신랑은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을 열다섯 살 소년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얼굴을 마주친 것은 이틀 전, 콩피에뉴 숲 어귀에서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오래 반목하던 두 왕가의 동맹이 두 아이의 결혼으로 봉해지는 자리였다. 빈에서 앙투아네트는 황후의 막내딸이었다. 베르사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궁정 사람들은 앙투아네트를 '로트리시엔',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불렀다 . 프랑스어로 이 이름의 끝은 욕설처럼 들...

핵어뢰를 세 번째 사람이 막았다

1962년 10월 27일, 카리브해 바닷속. 서른여섯 살의 소련 장교 한 사람이 땀에 젖은 좁은 통로에 서 있었다. 함 안 온도는 섭씨 40도를 훌쩍 넘었고, 공기는 탁했고, 네 시간 가까이 함체 바깥에서 둔탁한 폭발음이 울렸다. 그 배, B-59에서 핵어뢰를 쏘려면 세 사람이 서명해야 했다. 두 사람은 이미 서명했다. 남은 한 사람이 바실리 아르히포프였다. 그 하루가 가장 위험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열사흘 가운데 10월 27일은 가장 위험한 하루로 꼽힌다. 뒷날 '검은 토요일'이라 불린 그날, 쿠바 상공에서 미군 U-2 정찰기가 격추돼 조종사 루돌프 앤더슨 소령이 목숨을 잃었다. 열사흘을 통틀어 유일한 전투 사망자였다. 수면 위 세계가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바다 밑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또 다른 벼랑이 열리고 있었다. 그해 10월 1일, 소련 디젤 잠수함 네 척이 북쪽 콜라만 기지를 떠나 쿠바로 향했다. 네 척은 각각 핵어뢰를 한 발씩 싣고 있었다. 어뢰에 실린 탄두는 약 10킬로톤으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에 준하는 위력 이었다. 추운 북극해를 겨냥해 만든 배들이 열대의 바다로 내려오자, 함 내부는 사람이 오래 버티기 힘든 열기와 이산화탄소로 채워졌다. 미 해군은 봉쇄선을 지키며 소련 잠수함을 수면으로 끌어올리려고 훈련용 폭뢰를 떨어뜨렸다. 공격이 아니라 부상(浮上)하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며칠째 모스크바와 교신이 끊긴 B-59의 승조원들에게, 함체를 두드리는 폭발음과 진짜 공격을 구별할 방법은 없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쌤 1인 과외 학생관리 · 메모 한 줄로 수업료 청구 자동 생성 ▶ Google Play에서 설치 두 사람은 서명했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았다 함장 발렌틴 사비츠키는 전쟁이 이미 터졌다고 판단했다. 사비츠키는 핵어뢰를 전투 준비 상태로 조립해 발사관에 넣으라 명령했다. 함께 있던 정보장교 바딤 오를로프는 뒷날 그 순간을 이렇게 전했다. "전쟁이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우...

수배된 선장은 통신실에 있었다

1993년 10월 10일 오전 11시 40분, 전북 부안 위도 파장금항. 유진호 선장 최문수가 항구로 들어오다 10톤짜리 흰 배 고물에 서 있는 남자를 봤다. 감색 점퍼를 입고 빨간 캡을 손에 들고 있었다. 최문수는 남자를 백운두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반 전 위도 앞바다에서 뒤집힌 여객선 서해훼리호의 선장이었다. 최문수가 본 사람은 백운두가 아니었다. 부안경찰서 위도지서장 장복영 경위 였다. 착각 하나가 이미 죽어 있던 사람을 전국 수배자로 만드는 데는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 한 번 뜨는 배에 일요일마다 사람이 몰렸다 위도는 1980년대 후반부터 낚시터로 이름이 났다. 전국에서 낚시꾼이 몰려들면서 이용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 그런데 위도 파장금항과 부안 격포항을 잇는 배는 하루 왕복 한 번이었다. 증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배는 서해훼리호 하나였고, 일요일 아침이면 섬을 나가려는 주민과 뭍으로 돌아가려는 낚시꾼이 같은 배 앞에 섰다. 서해훼리호는 1990년 10월에 지은 110톤짜리 여객선이었다. 길이 33.9m, 폭 6.2m. 정원은 승무원 14명을 포함해 221명 이었다. 1993년 10월 10일 아침 파장금항에서 배에 오른 사람은 362명이었다. 정원보다 141명이 많았고, 화물 16톤이 함께 실렸다. 9시 40분, 백운두가 출항을 골랐다 일요일 아침 위도 앞바다에는 북서풍이 초당 10~14m로 불었고, 파도는 2~3m로 일었다. 여객선이 나가서는 안 되는 바다였다. 다만 폭풍주의보는 내려지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고, 일부 승객은 출항을 요구했다. 결정은 쉰여섯 살 선장 백운두의 몫이었다. 9시 40분, 서해훼리호가 파장금항을 떠났다. 30분 뒤인 10시 10분, 임수도 부근에서 배가 돌풍을 만났다. 백운두는 뱃머리를 돌렸다. 위도로 되돌아가려는 회항이었다. 뱃머리를 돌리던 도중 파도가 배를 때렸고, 서해훼리호는 그대로 뒤집혔다. 362명 가운데 70명이 구조됐다. 구조된 70명 안에 백운두는 없었다...

1만 7천 년 그림이 15년 만에 병들었다

1940년 9월 12일, 프랑스 남서부 몽티냑. 열일곱 살 마르셀 라비다가 친구 셋을 데리고 언덕의 좁은 구멍 앞에 섰다. 손에는 급히 만든 기름 등불과 큰 칼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네 소년은 금을 찾으러 온 참이었다. 구멍을 넓히고 라비다가 먼저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발밑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등불을 비추자 보물은 없었다. 대신 벽마다 짐승이 가득했다. 검은 소, 붉은 말, 뿔 달린 사슴. 소년들이 찾아낸 것은 약 1만 7천 년 전, 빙하기의 손이 그린 그림 이었다. 나라가 무너진 여름, 네 소년이 한 마을에 모였다 1940년 9월의 프랑스는 석 달 전 독일에 무너진 나라였다. 6월에 파리가 점령됐고, 사람들은 남쪽으로 흩어졌다. 몽티냑은 그 남쪽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라비다는 마을의 견습 정비공이었고, 열다섯 살 자크 마르살은 같은 마을 소년이었다. 나머지 둘, 조르주 아니엘과 시몬 쿠앙카스는 파리 쪽에서 몽티냑으로 흘러든 피란 소년들이었다. 마을에는 오래된 소문이 있었다. 숲 어딘가에 라스코 저택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고, 그 끝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였다. 며칠 전 라비다가 언덕에서 구멍 하나를 발견했을 때, 소년들이 떠올린 것도 이 보물 소문이었다. 구멍을 발견한 나흘 뒤, 라비다는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그 언덕으로 돌아왔다 . 개가 구멍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발견자가 부인했다 라스코 발견담에서 가장 널리 퍼진 장면은 개다. 로보라는 이름의 개가 구멍에 빠졌고, 소년들이 개를 꺼내려다 동굴을 찾았다는 이야기. 지금도 여행 안내판이 즐겨 옮기는 대목이다. 그런데 정작 발견자 라비다는 훗날 개 이야기를 부풀린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문화부의 공식 기록 도 그 구멍이 개가 아니라, 뽑혀 나간 나무가 남긴 자리였다고 적는다. 널리 퍼진 전설과 발견자 본인의 회고가 어긋나는 자리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니게임 ▶ Google Play에서 설치...

엿장수는 엿으로 먹고살지 않았다

1960년대 어느 골목. 동전 한 닢 없는 아이가 빈 병 하나를 들고 나왔다. 쩔꺽, 쩔꺽. 골목 어귀에서 큼직한 가위 소리가 두 번 났다. 아이는 병을 내밀었고, 엿장수는 엿 한 가락을 떼어 주었다. 병만이 아니었다. 헌 고무신 한 짝을 내밀어도, 깨진 쇠붙이를 내밀어도 엿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이 맞바꿈은 단맛을 얻는 놀이였고, 엿장수에게는 장사였다. 그리고 엿장수가 정말 팔던 것은 엿이 아니었다. 단것이 귀하던 시절, 아이들은 집 안을 뒤졌다 1960년대에는 단것이 흔치 않았다. 사 먹기보다 바꿔 먹는 편이 쉬웠다. 집 안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고물 한 조각이 엿 한 가락으로 바뀌었으니, 아이들은 안방과 부엌을 뒤졌다. 깨진 무쇠솥 조각, 짝 잃은 고무신, 구리 한 줌, 빈 병. 종이·쇠·빈 병 같은 고물을 받고 엿으로 바꿔 주는 방식 은 도시에서 특히 흔했고, 시골에서는 곡식으로도 거래됐다. 엿장수도 처음부터 손수레를 끌지는 않았다. 처음엔 엿판을 짊어지고 걸어서 골목을 돌았고, 1960년대 후반 리어카가 흔해지자 손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그 수레에는 엿보다 고물이 더 많이 실려 있었다. 가위는 엿을 자르는 연장이 아니라 악기였다 엿가위를 엿을 떼고 자르는 연장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엿가위의 진짜 쓸모는 자르는 데 있지 않았다. 소리였다. 골목 끝까지 닿는 쇳소리가 흩어져 있던 아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백과사전은 솜씨 좋은 엿장수가 가위다리를 맞부딪쳐 내는 소리에 흥을 실어 노래까지 불렀다 고 적는다. 파는 물건을 알리는 종이자, 사람을 모으는 악기였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쌤 1인 과외 학생관리 · 메모 한 줄로 수업료 청구 자동 생성 ▶ Google Play에서 설치 성악을 배운 아들이 넥타이를 풀고 가위를 잡았다 청주에 윤팔도라는 엿장수가 있었다. 팔십 평생을 장터에서 가위를 쳤고, 전국 장을 돌며 한 해 2천만 원을 벌던 때도 있었다. 젊은 날의 윤팔도는 장터에서 번 돈을 술판에 다 내던졌다. 남은 ...

기독교에서 가장 거룩한 문은 무슬림이 연다

새벽 4시 무렵, 예루살렘 구시가. 아디브 주데가 돌 골목을 걸었다. 손에는 쇠열쇠 하나가 들려 있었다. 골목 끝에는 예수 무덤 성당의 정문이 있다. 기독교에서 가장 거룩하다는 문이다. 문 앞에서 주데는 열쇠를 와지 누세이베에게 건넸다. 주데도 무슬림이고, 누세이베도 무슬림이다. 예수 무덤 성당은 여섯 교파가 나눠 갖고 있는 건물 인데, 여섯 교파 가운데 문 열쇠를 쥔 교파는 하나도 없다. 한 지붕 아래 여섯 주인이 산다 예수 무덤 성당은 골고다 언덕과 예수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자리를 한 지붕 안에 넣은 건물이다.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트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여섯 교파가 성당 한 채를 나눠 쓴다. 기둥 하나, 촛대 하나, 계단 한 칸까지 어느 교파 몫인지 정해져 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아예 성당 지붕 위에 자리를 잡고 산다. 몫을 이렇게까지 쪼개 둔 근거는 오스만 제국의 칙령이다. 1757년 술탄 오스만 3세가 성당 안의 것을 지금 있는 그대로 두라고 명했고, 1852년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다시 못을 박았다 . 여섯 교파가 전부 동의하지 않으면 성당 안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현상유지라고 부르는 원칙이다. 성당 정면 창턱에는 나무 사다리 한 개가 놓여 있다. 아무도 쓰지 않는 사다리다. 치우려면 여섯 교파가 모두 동의해야 하고, 동의는 나오지 않는다. 흔히 1757년 현상유지가 사다리를 묶어 놓았다고들 하는데, 순서는 반대에 가깝다. 사다리는 늦어도 1728년 판화에 이미 같은 창턱에 그려져 있다 . 현상유지보다 사다리가 먼저였고, 현상유지가 사다리를 그 자리에 얼려 버렸다. 사다리가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는 말도 정확하지는 않다. 1997년에 관광객 한 명이 사다리를 성당 안에 숨겨 놓았다고 전한다. 사다리는 같은 창턱으로 돌아왔다. 못 옮기는 물건이라기보다, 옮겨도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물건이다. 1187년, 열쇠가 성당 밖으로 나갔다 열쇠가 성당 밖...

일본 경찰이 소화제 약방 주인을 끌고 갔다

1919년 10월 31일 새벽, 서울 순화동. 일본 경찰이 약방 하나를 덮쳤다. 끌려간 사람은 서른여섯의 민강. 체하고 얹힌 사람들에게 물약 한 병을 팔던 가게의 주인이었다. 가게 이름은 동화약방, 물약 이름은 활명수. 목숨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이었다. 소화제를 파는 가게였는데, 경찰은 약을 찾고 있지 않았다. 궁 안에 있던 약, 궁 밖에서 앓던 사람들 활명수를 만든 사람은 민강의 아버지 민병호였다. 민병호는 궁중 선전관이었다. 임금 가까이에서 명령을 전하던 무관 자리이자, 궁중의 처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1890년대 조선에서 급체와 토사곽란은 흔한 병이었다. 배를 움켜쥐고 앓아도 집에서 달여 먹는 탕약 말고는 마땅한 약이 없었다. 약은 궁 안에 있었고, 사람들은 궁 밖에서 앓았다. 민병호는 궁중 비방에 서양 의학 지식을 붙여, 달이지 않고 병째로 마시는 물약을 만들었다. 1897년 9월 25일, 순화동 5번지 자기 집에 동화약방을 열었다 . 활명수를 한국 최초의 신약 이라 부르는 관행이 여기서 나왔다. 다만 이 표현은 회사와 언론이 함께 써 온 말이고, '신약'의 기준 자체가 느슨하다는 점은 감안해 두는 편이 정확하다. 값은 쌌던 적이 없다. 1910년대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 설렁탕 두 그릇 값이었다 . 그런데도 팔렸고, 팔린 만큼 베껴졌다. 이름만 조금씩 바꾼 유사품이 60여 종 깔렸다. 동화약방은 1910년 8월 15일 부채표를 특허국에 등록했다 . 이름을 지키려고 붙인 표시였다. 약방이 돈이 지나가는 길목이 됐다 1919년 3월 만세시위가 지나가고,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섰다. 서울에서도 4월 23일 정오 종로에서 국민대회가 열렸다. 민강은 준비자금의 출납을 맡았다 . 천도교 대표 안상덕과 기독교 대표 현석칠이 각각 600원씩 대기로 했고, 자금은 동화약방을 거쳐 가기로 정해졌다. 4월 20일, 민강은 안상덕이 가져온 500원을 김유인에게 넘겼다. 약방을 거쳐 간 500원으로 「국민대회...

쿠퍼 옆자리 승무원은 오십 년을 침묵했다

1971년 11월 24일 저녁, 시애틀 활주로.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305편의 계단으로 승객 서른여섯 명이 줄지어 내려갔다. 승무원 두 명도 따라 내렸다. 객실에 남은 사람은 스물두 살 승무원 티나 머클로 한 명, 그리고 검은 넥타이를 매고 붉은 원통과 전선이 든 서류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은 남자였다. 남자는 두 시간 뒤 현금 20만 달러를 몸에 묶고 비행기 뒷계단으로 뛰어내렸다. 미국은 오십 년이 넘도록 남자를 찾지 못했다. 세상이 오십 년 동안 물어온 질문은 하나였다. 그 남자는 누구였고 어디로 갔는가. 물어보지 않은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무원은 왜 오십 년 가까이 입을 열지 않았는가. 먼저, 이름부터 틀렸다 널리 쓰이는 'D.B. 쿠퍼'라는 이름은 납치범이 쓴 이름이 아니다. 포틀랜드 공항에서 현금으로 편도표를 사면서 남자가 적은 이름은 '댄 쿠퍼(Dan Cooper)'였다 . 사건 직후 취재 과정에서 한 기자가 이름을 잘못 옮겼고, 그 착오가 통신사를 통해 퍼지면서 'D.B. 쿠퍼'가 굳었다 . 오십 년 넘게 미국이 부르고 있는 이름은 처음부터 오자였다. 표를 살 때 신분증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71년 미국 국내선에는 승객 검색대가 없었다. 가방을 열어 보이는 절차도, 이름을 대조하는 절차도 없었다. 현금을 내면 표가 나왔고, 그대로 탔다. 미국이 국내선 승객 전원에게 금속탐지기와 소지품 검사를 통과하게 만든 것은 1973년 1월부터다 . 쿠퍼가 뛰어내리고 열네 달 뒤였다. 기장이 막내를 객실로 내려보냈다 이륙 직후, 쿠퍼는 승무원 플로렌스 섀프너에게 쪽지를 건넸다. 섀프너는 읽지 않고 핸드백에 넣었다. 혼자 탄 남자들이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쿠퍼가 몸을 기울여, 쪽지를 읽어보는 편이 좋을 거라고 했다. 가방 안에 폭탄이 있다고 했다. 기장 윌리엄 스콧은 섀프너를 조종실에 붙잡아 두고 쿠퍼의 요구를 받아적게 했다. 대신 객실...

사다코는 644마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1955년 히로시마 적십자병원. 열두 살 소녀가 침대에 앉아 종이학을 접고 있었다. 접을 종이가 모자라면 약을 싸던 포장지를 폈고, 어떤 학은 너무 작아 바늘 끝으로 접어야 했다. 소녀의 이름은 사다코 사사키. 소원은 하나였다. 낫는 것.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사다코가 644마리 에서 손을 멈췄다고 전한다. 천 마리를 채우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남은 학은 친구들이 대신 접어 관에 넣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히로시마가 남긴 기록은 조금 다른 숫자를 말한다. 폭심지에서 1.6킬로미터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 두 살 사다코는 폭심지에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집에 있었다. 폭풍이 사다코를 창밖으로 날렸지만, 화상도 눈에 보이는 상처도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했다. 남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방사선은 이미 몸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부모도 사다코도 알 길이 없었다.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방사선이 남긴 병은 몇 해가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백혈병이 그중 하나였다. 사다코는 건강하게 자랐다. 학교에서 계주 선수로 뽑힐 만큼 빠른 아이였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1954년 11월, 사다코의 목에 멍울이 돋았다 . 폭탄이 남긴 병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병실에서 접기 시작하다 1955년 2월 21일, 사다코는 히로시마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진단명은 백혈병. 의사는 사다코에게 남은 시간이 한 해쯤이라고 보았다. 사다코는 열두 살이었다. 병실에서 사다코는 천 마리 학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에는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센바즈루(千羽鶴)라 불리는 이 풍습은 병문안 자리에서 회복을 비는 마음으로 자주 접힌다. 사다코의 소원은 분명했다. 살아서 병실을 나가는 것. 종이가 모자랐다. 사다코는 약 포장지를 펴고, 손에 잡히는 온갖 종잇조각을 다 폈다. 종이가 작을수록 학도 작아졌다. 종이가 생길 때마다 사다코는 또 접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

김옥균은 자객을 두 번 알아보고 배를 탔다

1894년 3월 28일 오후, 상하이 미국 조계 안의 일본 여관 동화양행. 2층 객실에서 김옥균이 총에 맞았다. 세 발이었다. 쏜 사람은 김옥균과 같은 배로 상하이에 들어온 조선인 이었다. 김옥균은 자객을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조선 조정이 일본으로 보낸 자객은 1885년의 장은규와 1886년의 지운영 두 사람이었고, 두 번 다 김옥균이 먼저 알아챘다. 1886년부터 1894년까지 여덟 해 동안, 조선 조정이 보낸 칼은 김옥균에게 닿지 못했다. 자객을 두 번 알아본 김옥균이, 조선인 한 사람을 곁에 두고 상하이행 배에 올랐다. 여덟 해를 살아남은 사람이 스스로 곁을 내준 동행이었다. 김옥균이 조선에서 잡은 권력은 사흘이었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서울. 조선의 첫 우체국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자리에서 김옥균과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켰다. 새 내각이 섰고, 개혁 정강이 나왔다. 사흘째 되던 12월 6일, 청군이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 갑신정변 은 그렇게 끝났다. 김옥균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에서 잡은 권력이 사흘, 일본에서 보낸 망명이 아홉 해였다. 일본은 김옥균을 잠깐 반겼다가 곧 냉담해졌다. 청을 자극하고 싶지 않은 일본 정부에게 망명객 김옥균은 짐이었다.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라는 일본 이름을 쓰며 각지를 떠돌았다.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조선은 송환을 거듭 요구했고, 자객이 실제로 바다를 건너오면서 김옥균의 체류 자체가 두 나라 사이의 외교 문제가 됐다. 일본 정부가 고른 답은 추방도 인도도 아닌 격리였다. 1886년 8월, 김옥균은 태평양 한가운데 오가사와라섬으로 보내졌다 . 2년 뒤인 1888년 7월에는 북쪽 끝 홋카이도 삿포로로 옮겨졌다 . 일본 지도의 남쪽 끝과 북쪽 끝이었다. 김옥균은 자기를 죽이려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자객이 다녀간 뒤 김옥균이 한 일은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니었다. 1886년, 김옥균은 고종에게 올릴 상소문을 썼다. 자기를 죽이...

피투성이 김일이 이노키를 껴안았다

1975년 3월 27일 저녁, 서울 장충체육관. 8천 명이 들어찼다. 링 위에서 김일의 왼쪽 귀가 베였다. 안토니오 이노키의 주먹은 김일의 왼쪽 귀로만 몰렸고,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로 김일은 머리를 내리꽂기 시작했다. 걸려 있는 것은 김일의 인터내셔널 헤비급 벨트였다. 13분 38초 뒤, 심판은 스물을 셌다. 벨트는 김일에게 남았다. 이긴 사람은 없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은 국민적인 인기를 누린 종목이었다. 국가기록원이 두 시대를 정리한 기록 에는 김일의 박치기와 역도산 문하라는 이력이 인기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다만 링 위의 김일에게는 이름이 셋 있었고, 셋 가운데 한국 이름은 일본 링에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고흥의 김태식이 어선에 올랐다 첫 번째 이름은 김태식이다. 1929년 2월 24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에서 태어난 본명 이다. 1955년 일본의 거리에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집집마다 수상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 역 앞과 광장에 세워둔 텔레비전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닛폰테레비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가 설치를 밀어붙인 가두 텔레비전 이었다. 관중이 특히 쇄도한 방송은 프로레슬링, 복싱, 스모, 프로야구 중계였다. 화면 속에서 미국 선수들을 넘어뜨리는 사람의 이름은 역도산이었다. 전쟁에 진 나라에서 역도산은 이기는 사람이었다. 고흥의 김태식이 역도산을 동경했다. 일본 쪽 기록 은 김태식이 1958년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입국했다고 적는다. 여권도 배편도 없었다. 어선이었다. 역도산이 제자에게 한국 이름을 금했다 이듬해 김태식은 출입국 관리법 위반으로 붙잡혀 갇혔다. 갇힌 자리에서 김태식이 한 일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한국 쪽 기록 과 일본 쪽 기록이 함께 전하는 대목이다. 역도산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고 썼다. 역도산이 신원 인수인으로 나섰다. 일본프로레슬링 커미셔너를 맡고 있던 정치인 오노 반보쿠까지 움직였고, 김태식은 풀려나 일본프로레슬링에 들어갔다. 밀입국자를 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