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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된 선장은 통신실에 있었다

1993년 10월 10일 오전 11시 40분, 전북 부안 위도 파장금항. 유진호 선장 최문수가 항구로 들어오다 10톤짜리 흰 배 고물에 서 있는 남자를 봤다. 감색 점퍼를 입고 빨간 캡을 손에 들고 있었다. 최문수는 남자를 백운두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반 전 위도 앞바다에서 뒤집힌 여객선 서해훼리호의 선장이었다. 최문수가 본 사람은 백운두가 아니었다. 부안경찰서 위도지서장 장복영 경위 였다. 착각 하나가 이미 죽어 있던 사람을 전국 수배자로 만드는 데는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 한 번 뜨는 배에 일요일마다 사람이 몰렸다 위도는 1980년대 후반부터 낚시터로 이름이 났다. 전국에서 낚시꾼이 몰려들면서 이용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 그런데 위도 파장금항과 부안 격포항을 잇는 배는 하루 왕복 한 번이었다. 증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배는 서해훼리호 하나였고, 일요일 아침이면 섬을 나가려는 주민과 뭍으로 돌아가려는 낚시꾼이 같은 배 앞에 섰다. 서해훼리호는 1990년 10월에 지은 110톤짜리 여객선이었다. 길이 33.9m, 폭 6.2m. 정원은 승무원 14명을 포함해 221명 이었다. 1993년 10월 10일 아침 파장금항에서 배에 오른 사람은 362명이었다. 정원보다 141명이 많았고, 화물 16톤이 함께 실렸다. 9시 40분, 백운두가 출항을 골랐다 일요일 아침 위도 앞바다에는 북서풍이 초당 10~14m로 불었고, 파도는 2~3m로 일었다. 여객선이 나가서는 안 되는 바다였다. 다만 폭풍주의보는 내려지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고, 일부 승객은 출항을 요구했다. 결정은 쉰여섯 살 선장 백운두의 몫이었다. 9시 40분, 서해훼리호가 파장금항을 떠났다. 30분 뒤인 10시 10분, 임수도 부근에서 배가 돌풍을 만났다. 백운두는 뱃머리를 돌렸다. 위도로 되돌아가려는 회항이었다. 뱃머리를 돌리던 도중 파도가 배를 때렸고, 서해훼리호는 그대로 뒤집혔다. 362명 가운데 70명이 구조됐다. 구조된 70명 안에 백운두는 없었다...

피투성이 김일이 이노키를 껴안았다

1975년 3월 27일 저녁, 서울 장충체육관. 8천 명이 들어찼다. 링 위에서 김일의 왼쪽 귀가 베였다. 안토니오 이노키의 주먹은 김일의 왼쪽 귀로만 몰렸고,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로 김일은 머리를 내리꽂기 시작했다. 걸려 있는 것은 김일의 인터내셔널 헤비급 벨트였다. 13분 38초 뒤, 심판은 스물을 셌다. 벨트는 김일에게 남았다. 이긴 사람은 없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은 국민적인 인기를 누린 종목이었다. 국가기록원이 두 시대를 정리한 기록 에는 김일의 박치기와 역도산 문하라는 이력이 인기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다만 링 위의 김일에게는 이름이 셋 있었고, 셋 가운데 한국 이름은 일본 링에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고흥의 김태식이 어선에 올랐다 첫 번째 이름은 김태식이다. 1929년 2월 24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에서 태어난 본명 이다. 1955년 일본의 거리에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집집마다 수상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 역 앞과 광장에 세워둔 텔레비전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닛폰테레비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가 설치를 밀어붙인 가두 텔레비전 이었다. 관중이 특히 쇄도한 방송은 프로레슬링, 복싱, 스모, 프로야구 중계였다. 화면 속에서 미국 선수들을 넘어뜨리는 사람의 이름은 역도산이었다. 전쟁에 진 나라에서 역도산은 이기는 사람이었다. 고흥의 김태식이 역도산을 동경했다. 일본 쪽 기록 은 김태식이 1958년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입국했다고 적는다. 여권도 배편도 없었다. 어선이었다. 역도산이 제자에게 한국 이름을 금했다 이듬해 김태식은 출입국 관리법 위반으로 붙잡혀 갇혔다. 갇힌 자리에서 김태식이 한 일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한국 쪽 기록 과 일본 쪽 기록이 함께 전하는 대목이다. 역도산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고 썼다. 역도산이 신원 인수인으로 나섰다. 일본프로레슬링 커미셔너를 맡고 있던 정치인 오노 반보쿠까지 움직였고, 김태식은 풀려나 일본프로레슬링에 들어갔다. 밀입국자를 링으...

대통령을 쏜 남자는 남산으로 가지 않았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 담장 안 안가의 만찬 자리에 네 남자가 한 상에 둘러앉았다 . 대통령 박정희, 경호실장 차지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 그리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저녁 6시경 시작된 만찬은 7시 40분경 총성으로 끝났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침입자도 경비병도 아니었다. 대통령과 마주 앉아 있던 김재규였다. 총격은 성공했다. 1961년 5·16부터 18년을 집권한 대통령이 만찬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을 통째로 쥔 김재규는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붙잡혔다. 가장 많은 비밀과 가장 많은 부하를 가진 남자가 왜 하룻밤 만에 무너졌나. 답은 방아쇠가 아니라, 총을 쏜 다음에 있다. 두 달 전부터 유신은 금이 가고 있었다 총성이 울리기 두 달 남짓 전부터 유신 체제는 흔들리고 있었다. 1979년 8월, 서울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강제 진압으로 끌려 나왔다. 10월 4일에는 여당이 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빼앗았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고, 시위는 학생을 넘어 시민들 사이로 번져 마산으로 옮겨붙었다. 10월 18일 0시, 정부는 부산에 계엄을 선포했다. 계엄 선포 뒤 연행된 사람만 1,058명이었다 . 부산과 마산의 거리를 두고 청와대 안에서 두 남자가 갈라졌다. 차지철은 강경 진압을 밀었고, 김재규는 반대편에 섰다. 김재규는 부산에 직접 내려가 시위를 눈으로 확인했고, 뒷날 법정에서 부산의 시위는 학생들의 데모가 아니라 민란에 가까웠다고 진술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데모대원 100만, 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차지철이 했다는 말이다. 다만 짚어 둘 것이 하나 있다. 위 발언은 김재규가 재판정에서 옮기면서 세상에 알려진 말 이다. 차지철 본인은 궁정동에서 목숨을 잃었고, 발언을 따로 확인해 줄 기록은 없다. 남은 통로가 총을 쏜 사람의 법정 진...

불 지른 열차에선 아무도 안 죽었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 중앙로역. 한 남자가 열차 바닥에 휘발유를 붓고 라이터를 켰다. 불은 순식간에 한 칸을 삼켰다. 그리고 그 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살아서 걸어 나왔다. 그날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다쳤다 . 그런데 불이 처음 붙은 1079호 열차에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 죽은 사람들은 불이 난 곳에 있지 않았다. 반대편 선로로 들어와 멈춘 다른 열차 안에 있었다. 라이터를 켠 남자가 사람들을 태워 죽였다는 건, 실제로 일어난 일의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불을 낸 사람, 그리고 값이 깎인 열차 불을 낸 사람은 56세 김대한이었다. 2001년 뇌졸중으로 몸 한쪽이 마비됐고 , 그 뒤로 우울증을 앓았다. 혼자 죽기는 싫다고 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생을 끝내려고, 우유갑에 휘발유를 담아 지하철에 올랐다. 그의 사정은 그날 벌어진 일의 시작일 뿐, 규모의 원인은 아니었다. 대구 지하철 1호선은 1997년 개통해 그때 여섯 해째였다. 문제는 열차가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느냐였다. 의자는 폴리우레탄 폼, 바닥과 통로는 폴리염화비닐(PVC)이었다. 값이 싼 재료였고, 불이 붙으면 빠르게 타면서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뿜었다 . 대구의 전동차 한 량 값은 5억 원 안팎으로, 같은 시기 수출용으로 만들던 전동차 한 량 값의 3분의 1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액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방향은 하나로 모인다. 아침마다 사람을 실어 나르던 열차는, 값을 아끼려고 고른 재료로 만들어져 있었다. 반대편에 들어온 1080호 불이 난 지 3분쯤 뒤, 반대편 승강장으로 1080호 열차가 들어와 멈췄다. 중앙로역은 이미 검은 연기로 차오르고 있었다. 종합사령실은 폐쇄회로 화면으로 그 연기를 보고 있었다. 1080호로 무전이 갔다. 화재가 났으니 조심해서 진입하라는 내용이었다. 멈추라는 말도, 그냥 지나치라는 말도 없었다. 판단은 현장에 남겨졌다. 1080호 기관사는 연기를 보고 열려 있...

철판 한 장으로 덮었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38분. 서울 성수대교 위로는 출근하는 차와 등교하는 학생들이 뒤섞여 있었다. 무학여고 학생들을 태운 16번 시내버스도 그 위에 있었다. 다리 한가운데, 제10번과 11번 교각 사이의 상판 48미터 가 한순간에 끊어져 20미터 아래 한강으로 떨어졌다. 차 여섯 대가 함께 빠졌다. 이 사고로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 지은 지 15년 밖에 안 된 다리였다. 사람들은 처음에 다리가 낡아서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5년 된 다리는 낡은 다리가 아니다. 멀쩡해 보이던 다리가 출근길 한복판에서 끊어진 이유는, 세월보다 훨씬 사람의 손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날렵하게 짓고 싶었던 다리 성수대교는 1977년에 착공해 1979년 10월 동아건설이 완공했다. 한강에 놓인 다리 가운데 처음으로 거버 트러스라는 공법 을 썼다. 다리를 더 날씬하고 보기 좋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튼튼함보다 미관을 앞세운 선택 이었다. 거버 트러스는 부재 하나하나가 서로를 받치는 구조다. 계산이 간단하고 모양이 우아한 대신, 약점이 하나 있었다. 핵심 부재 하나가 끊어지면 그 무게를 나눠 받을 곳이 없어 전체가 함께 내려앉는다. 우아함과 위태로움이 같은 설계 안에 들어 있었다. 다리는 멀쩡하거나, 아니면 통째로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다리가 놓일 때 강남은 아직 논밭에 가까웠다. 설계는 하루 차량 8만 대를 견디도록 잡혔고, 1979년의 교통량에는 넉넉한 숫자였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두 배가 된 무게 1993년, 동부간선도로 성수~상계 구간이 뚫렸다. 강남이 커지면서 다리를 건너는 차가 빠르게 늘었다. 설계 기준이 하루 8만 대였는데, 1994년에는 하루 16만 대 가 다리를 밟고 지나갔다. 견디기로 한 무게의 두 배가 매일 다리를 짓눌렀다. 여기서 앞 장의 부실한 용접이 문제가 된다. 한 번에 끊어질 정도는 아니어도, 약하게 박힌 용접 자리에 매일 두 배의 무게가 실리면 금속에는 눈에 안 보이는 미세한 균열이 자란다. ...

택시 200대가 군인 쪽으로 갔다

1980년 5월 20일 저녁 6시, 광주 무등경기장 앞. 한 택시 기사가 핸들을 쥐고 전조등 스위치를 올렸다. 옆 차도, 그 옆 차도 따라 불을 켰다. 잠시 뒤 200대 가까운 택시가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도청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 앞줄엔 대형 트럭과 버스가 섰고, 뒤로 택시가 길게 줄을 이었다. 택시는 기사들이 하루를 버는 밥줄이었다. 그 밥줄을 몰고 곤봉과 최루탄이 선 쪽으로 향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공수부대가 내려온 도시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권력은 신군부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튿날 광주에 공수부대가 내려왔다 . 군인들은 거리에서 학생과 시민을 곤봉과 대검으로 다뤘다. 외부로 통하는 전화가 끊기고 도로가 막히면서, 광주는 바깥과 떨어진 섬처럼 고립돼 있었다. 택시 기사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싸움이 아니라 운반이었다. 피를 흘리는 사람을 태우고 병원으로 달렸다 . 그런데 계엄군은 부상자를 실은 택시를 세웠다. 환자와 운전사를 함께 끌어내려 다시 때리고 데려갔다. 도망치는 학생을 태운 택시는 대검에 찔렸다. 2017년 경향신문에 증언을 남긴 기사 이행기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건 폭력이 아니라 살인이었어요. 혼자서는 안 됐다 택시 한 대가 부상자를 실으면 군인들이 곧바로 차를 세워 기사를 끌어냈다. 한 대로는 사람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기사들은 입에서 입으로 시각과 장소를 정했다. 5월 20일 저녁 6시, 무등경기장 앞. 택시는 기사 대부분이 가진 거의 전부였다. 그 전부를 최루탄 앞에 세우기로 마음을 정하면서, 기사들은 같은 말을 입에 올렸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200개의 전조등 약속한 시각, 200대 가까운 차가 한꺼번에 ...

한 남자가 580억에 서명했다

1997년 12월 3일 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종이 한 장 앞에 앉았다. 저녁 7시 25분, 펜을 들어 이름을 적었다. 종이 한 장에 약 580억 달러 가 걸려 있었다. 임창열이 부총리가 된 것은 서명하기 꼭 2주 전이었다. 취임 2주 만에, 한 나라 구제금융으로는 당시 가장 컸던 약속의 서명란을 넘겨받은 셈이다. 한국은 12월 3일의 서명에서부터, 사람들이 한 시기를 'IMF'라는 세 글자로 부르는 시절로 들어섰다. 빈 금고를 물려받다 1997년은 큰 회사가 줄줄이 쓰러진 해였다. 1월에 한보가 무너졌고, 여름엔 기아가 7월 15일 부도유예협약 으로 넘어갔다. 대기업이 갚지 못한 빚은 곧 은행의 부실이 됐고, 한국에 단기로 돈을 빌려줬던 외국 금융기관들은 만기를 연장해 주지 않았다. 가을이 되자 달러가 나라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 무렵 정부가 당장 쓸 수 있던 외환은 한때 39억 달러 안팎, 바닥까지 떨어졌다. 위기가 손쓸 수 없이 번지자 정부는 경제팀을 갈아치웠다.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가 물러나고 임창열이 후임이 됐다. 임창열에게 주어진 것은 거의 빈 금고였다. 닷새 만에 손을 벌리다 금고가 비어 가던 11월, 한 외국인이 가명을 쓰고 한국에 몰래 들어왔다. 11월 16일 오후, 캉드쉬 IMF 총재가 신분을 감춘 채 입국 해 정부와 비공개로 만났다. 구제금융 협상이 시작됐다는 신호였다. 닷새 뒤인 11월 21일 밤 10시, 임창열이 마이크 앞에 서서 IMF에 자금 지원을 공식 요청한다고 발표 했다. 부총리가 된 지 사흘째였다. 그리고 발표 12일 뒤인 12월 3일, 임창열이 양해각서에 서명 했다. 한 번 적은 이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니게임 ▶ Google Play에서 설치 🎬 영상으로 보기 580억이라는 숫자의 정체 여기서 많은 사람이 한 가지를 잘못 기억한다. "IMF가 한국...

선장이 버린 배

강삼정은 배를 두고 떠났다. 1970년 12월, 제주도 성산포. 선주가 규정을 넘겨서라도 화물을 채우라고 했고, 강삼정 선장은 선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직서를 쓰는 게 빨랐다. 강삼정이 비운 선장 자리에 강태수가 들어왔다. 1970년 12월 14일 밤 8시 10분, 강태수가 성산포에서 닻을 올렸다. 남영호에는 338명 이 타고 있었다. 나흘 동안 감귤과 승객이 성산포에 쌓였다 1970년 12월 제주는 감귤 수확 절정기였다. 감귤 재배가 제주 농가의 핵심 소득원으로 자리잡은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겨울마다 수확한 감귤을 육지로 보내야 했고, 성산포·서귀포 항구에는 출하를 기다리는 화물이 쌓였다. 12월이 되면 항구는 감귤 상자와 출항 대기 인파로 가장 붐볐다. 1970년 12월에는 폭풍주의보가 겹쳤다. 나흘 동안 배가 뜨지 못했다. 육지로 가려는 승객들이 성산포항에 몰렸고, 항구에는 감귤 화물과 대기 승객이 한꺼번에 쌓였다. 선주 입장에서 나흘치 화물과 나흘치 승객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의 기록에 따르면, 남영호의 허용 화물 적재량은 130톤 이었다. 사고 당일 남영호에 실린 화물 총량은 약 543톤 으로 추산된다. 감귤 상자를 중심으로 규정의 4배를 넘겼다. 선주는 강삼정 선장에게 규정을 초과하더라도 짐을 싣도록 압박했다. 강삼정은 사직했고, 강태수는 출항했다 강삼정 선장은 선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귀포신문 은 남영호 사고를 인재(人災)로 규정하면서, 강삼정이 과적 압박에 버티다 사직한 경위를 전한다. 강삼정은 사고 이후 이 침몰이 예견된 사고였다고 했다. 강삼정이 떠난 선장 자리를 강태수가 맡았다. 12월 14일 저녁, 남영호는 서귀항을 출발해 성산포에 기항했다. 나흘을 기다린 승객들이 한꺼번에 배에 올랐다. 머니투데이 2024년 보도 는 출항 전 배가 이미 한쪽으로 기운 상태였다는 목격자 증언을 전한다. 강태수 선장은 처음에 출항을 거부했다. 성산포 선박업자가 다시...

지은 지 4개월 된 아파트가 무너졌다

1970년 4월 8일 아침, 마포 와우산. 산비탈에 줄지어 선 시민아파트 가운데 와우아파트 15동이 통째로 주저앉았다. 5층 건물이 비탈 아래 판잣집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파트 주민 33명이 죽었고, 비탈 아래 판잣집에서 한 명이 더 죽었다 . 준공이 1969년 12월이었다. 지은 지 4개월 된 건물이었다. 4개월 만에 무너지는 집은 없다. 무너진 까닭을 따라가면 4년 전, 1966년의 서울에 닿는다. 서울시가 무허가 건물 13만 6천 동을 셌다 1966년 봄,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했다. 별명이 불도저였다. 서울시가 무허가 건물을 셌다. 1967년 집계로 약 13만 6천 동 이었다. 전쟁 뒤 서울로 밀려든 사람들이 산비탈과 하천변에 지은 판잣집들이었다. 1966년 가을에는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서울에 왔다. 정부가 먼저 세운 계획은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드는 길가의 판잣집을 함석 담장으로 가리는 것 이었다. 판잣집은 헐기엔 너무 많았고, 두기엔 너무 잘 보였다. 김현옥의 답은 아파트였다. 판잣집을 헐고,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을 산비탈의 새 아파트로 올려보낸다는 계획이었다. 가난을 없애는 계획이라기보다, 가난을 다시 배치하는 계획에 가까웠다. 서울시는 3년 안에 2,000동을 짓기로 했다 1969년, 시민아파트 사업이 시작됐다. 서울시 계획은 3년 안에 2,000동, 10만 호. 잡힌 돈은 240억 원 이었다. 단순히 나누면 한 동에 1,200만 원꼴이었다. 산비탈 높은 곳에 왜 짓느냐는 물음에 김현옥이 내놓았다는 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발언의 출처는 짚어둘 필요가 있다. 기록을 남긴 사람은 손정목이다. 손정목은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뒤인 1970년에 후임 시장 양택식에게 발탁돼 서울시에 들어갔고, 1977년까지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지냈다 . 서울 도시계획의 안쪽을 직접 들여다본 사람의 기록이라 무게가 있지만, 발언 당시의 속기록은 아니다. 김현옥의 입에서 나온 ...

수용소장이 자기 수용소에 갇혔다

1952년 5월 7일 오후, 거제도 제76수용소 정문. 미군 준장 프랜시스 도드가 장교 한 명과 함께 철조망 앞에 섰다. 포로 대표가 면담을 요청했고, 도드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작업조가 드나들도록 정문이 열린 순간, 안쪽의 포로들이 도드를 붙잡아 철조망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함께 있던 장교는 문기둥을 붙잡고 빠져나왔다. 도드는 사라졌다. 그가 책임지던 포로는 17만 명이 넘었다. 수용소를 지휘하던 사람이, 자기가 지휘하던 철조망 안에 갇혔다. 17만 명이 한 섬에 모인 이유 거제도에 이만한 규모의 수용소가 생긴 건 전쟁의 형편 때문이었다. 1950년 가을 인천상륙작전 뒤 전선이 북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사로잡힌 인민군과 중국군 포로가 급격히 불어났다. 육지의 수용소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고, 본토에서 떨어진 섬이 통제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더해졌다. 1951년, 거제도 고현·수월 일대에 거대한 수용소 단지가 들어섰다. 문제는 그 안이 또 하나의 전선이었다는 데 있다. 17만 명은 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가 막사별로 갈렸고, 철조망 안에서 자기들끼리 조직을 만들어 충돌했다. 인민재판, 폭행, 살해가 수용소 안에서 벌어졌다. 미군 경비병은 17만 명이 만든 내부 권력 구조를 사실상 통제하지 못했다. 판문점이 막힌 자리, 포로 한 사람의 의사 같은 시기, 판문점에서는 1951년부터 휴전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전선의 총성은 잦아들었지만 회담은 한 지점에서 멈춰 있었다 — 포로를 본인 뜻과 상관없이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인가. 유엔군 측은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포로를 강제로 송환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공산 측은 전원 송환을 요구했다. 이 한 가지가 풀리지 않아 한국전쟁의 휴전은 이후로도 1년 넘게 미뤄졌다. 자발적 송환이냐 강제 송환이냐 — 거제도 철조망 안의 분열은 바로 이 쟁점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누가 남고 누가 돌아갈지를 한 명씩 가려내는 심사 작업은 이미 유혈 사태로 번진 뒤였다. 도드를 정문...

맑은 날, 백화점이 20초 만에 사라졌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서울 서초동. 퇴근 시간이 가까운 백화점은 평소처럼 붐볐다. 그리고 약 20초. 지상 5층부터 지하 4층까지, 건물 한 채가 한꺼번에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비도 지진도 없는 맑은 날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502명이 목숨을 잃었고, 900명이 넘게 다쳤다 . 단일 건물 사고로는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규모였다. 그런데 이 붕괴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빠지는 한 가지가 있다. 삼풍은 그날 갑자기 무너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백화점은 백화점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삼풍이 강남 서초동에 문을 연 것은 1989년 말 이었다. 주인은 이준 회장. 그런데 처음 그려진 도면의 이름은 백화점이 아니었다. 삼풍은 원래 지상 4층짜리 종합상가로 설계됐다. 상가와 백화점은 같은 건물이 아니다. 매장 칸이 잘게 나뉘는 상가와 달리, 백화점은 넓은 매장을 위해 벽을 걷어내고 무게를 기둥 몇 개에 몰아준다. 이준 회장은 더 큰 매장을 원했다. 상가 도면 위에 백화점이 얹혔고, 설계에 없던 5층이 4층 위에 다시 얹혔다. 건물의 용도가 바뀌었는데, 그 무게를 받칠 뼈대는 그만큼 두꺼워지지 않았다. 가장 가는 뼈대에 가장 무거운 짐 삼풍은 대들보가 없는 무량판 구조 였다. 기둥이 바닥판을 직접 떠받치는 방식이다. 이 구조 자체가 결함은 아니다. 다만 약점이 분명하다 — 기둥 하나가 버티지 못하면, 그 위층 바닥이 무너지고 충격이 아래층으로 번지며 차례로 주저앉는다. 그래서 무량판은 기둥의 굵기와 철근이 설계대로여야 한다. 붕괴 후 잔해로 들어간 조사관들이 본 기둥은 설계보다 가늘었다. 기둥 지름은 800mm에서 600mm로, 안에 들어가야 할 철근은 16개에서 8개로 줄어 있었다 . 매장에 에스컬레이터를 넣으려고 기둥의 일부를 잘라낸 자리도 나왔다. 떠받칠 힘은 깎이는 동안, 얹히는 짐은 오히려 늘었다. 결정타는 옥상이었다. 무거운 냉각탑을 옥상으로 올리면서, 크레인을 쓰지 않고 굴림대에 실어 옥상 바닥 위로 끌어 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