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이 버린 배

강삼정은 배를 두고 떠났다. 1970년 12월, 제주도 성산포. 선주가 규정을 넘겨서라도 화물을 채우라고 했고, 강삼정 선장은 선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직서를 쓰는 게 빨랐다.

강삼정이 비운 선장 자리에 강태수가 들어왔다. 1970년 12월 14일 밤 8시 10분, 강태수가 성산포에서 닻을 올렸다. 남영호에는 338명이 타고 있었다.

나흘 동안 감귤과 승객이 성산포에 쌓였다

1970년 12월 제주는 감귤 수확 절정기였다. 감귤 재배가 제주 농가의 핵심 소득원으로 자리잡은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겨울마다 수확한 감귤을 육지로 보내야 했고, 성산포·서귀포 항구에는 출하를 기다리는 화물이 쌓였다. 12월이 되면 항구는 감귤 상자와 출항 대기 인파로 가장 붐볐다.

1970년 12월에는 폭풍주의보가 겹쳤다. 나흘 동안 배가 뜨지 못했다. 육지로 가려는 승객들이 성산포항에 몰렸고, 항구에는 감귤 화물과 대기 승객이 한꺼번에 쌓였다. 선주 입장에서 나흘치 화물과 나흘치 승객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의 기록에 따르면, 남영호의 허용 화물 적재량은 130톤이었다. 사고 당일 남영호에 실린 화물 총량은 약 543톤으로 추산된다. 감귤 상자를 중심으로 규정의 4배를 넘겼다. 선주는 강삼정 선장에게 규정을 초과하더라도 짐을 싣도록 압박했다.

강삼정은 사직했고, 강태수는 출항했다

강삼정 선장은 선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귀포신문은 남영호 사고를 인재(人災)로 규정하면서, 강삼정이 과적 압박에 버티다 사직한 경위를 전한다. 강삼정은 사고 이후 이 침몰이 예견된 사고였다고 했다.

강삼정이 떠난 선장 자리를 강태수가 맡았다. 12월 14일 저녁, 남영호는 서귀항을 출발해 성산포에 기항했다. 나흘을 기다린 승객들이 한꺼번에 배에 올랐다. 머니투데이 2024년 보도는 출항 전 배가 이미 한쪽으로 기운 상태였다는 목격자 증언을 전한다.

강태수 선장은 처음에 출항을 거부했다. 성산포 선박업자가 다시 봐 달라고 요청했다. 강태수는 오후 8시 10분, 닻을 올렸다. 위키백과의 남영호 침몰 사고 항목은 당시 여객선 업계에서 선박업자의 압박이 관행처럼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강태수 선장 혼자 버티기엔 한계가 있었다. 성산포를 떠난 배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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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15분, 감귤 상자가 쏟아졌다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 15분. 여수 동남쪽 약 52킬로미터 해상. 강한 바람이 갑판을 덮쳤다. 갑판 위에 쌓인 감귤 상자들이 일제히 좌현으로 쏟아졌다. 남영호가 기울었다. 성산포를 떠난 지 5시간여 만이었다.

강태수 선장은 침몰 직전 SOS를 타전했다. 한국 해경은 응답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2021년 보도에 따르면, 일본 해상보안본부가 한국 해경에 무선을 보냈다. 낮 12시 30분까지 부산과 제주 해경에 연락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일본 어선 두 척이 먼저 구조에 나섰다. 한국 정부는 사고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강삼정이 사직서를 냈던 이유가 1970년 12월 15일 새벽 해상에서 실현됐다. 과적된 감귤 상자가 무게중심을 무너뜨렸고, 326명이 여수 앞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진상규명은 55년을 기다렸다

338명12명이 살았다. 머니투데이 2025년 보도에 실린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한 생존자는 바다 위에서 감귤 궤짝에 의지해 떠다녔다고 했다. 배를 가득 채운 감귤이, 침몰 후 한 사람을 살렸다.

영국 보험사 로이드는 선주의 과실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다음 2020년 보도는 선주의 과적 결정이 보험금까지 날린 경위를 전한다. 선주가 배를 채운 감귤이, 선주의 보험금도 삼켰다.

대한민국의 침몰 사고 목록에서 남영호 침몰은 단일 사고 기준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해상 참사로 기록돼 있다. 세월호 사고(2014년, 304명)보다 22명이 더 많다. 설이 갈리는 부분도 있다. 나무위키는 당시 승선 인원 집계 자체가 부정확해 실제 사망자 수는 더 많을 수 있다고 전한다.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논의는 사고 55년 뒤인 2025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25년 12월 보도에 따르면, 유족들은 수십 년간 국가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묻지 못했다. 국가기록원에는 사고 관련 기록이 보존돼 있으나, 피해자 보상과 책임 규명은 오랫동안 공백으로 남았다.

강삼정은 결국 맞았다. 사직서를 낸 선장만이, 남영호가 성산포를 떠나기 전에 이 사고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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