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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어뢰 특허를 냈다

1942년 8월 11일, 미국 특허청이 특허 2,292,387번을 등록했다. 제목은 '비밀 통신 시스템'. 발명자 칸에는 이름이 둘 적혀 있었다. 조지 안타일, 그리고 헤디 키슬러 마키. 뒤의 이름은 같은 해 미국 극장 간판에도 걸려 있었다. MGM 배우 헤디 라마. 빈의 저녁 식탁 헤디 라마는 1914년 11월 9일 빈에서 태어났다 . 본명은 헤드비히 키슬러. 유럽에서 이름이 먼저 알려졌고, 열여덟이던 1933년 8월 빈 카를 성당에서 무기 제조업자 프리드리히 만들과 결혼했다 . 만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손꼽히는 탄약 사업가였고, 파시즘 진영과 거래하는 쪽 이었다. 저택에는 저녁마다 군인과 기술자가 모였다. 화제는 늘 무기였다. 어뢰, 유도 장치, 통신 교란. 열여덟 살 신부는 식탁 끝에 앉아 오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1930년대 유럽에서 무선 조종 어뢰는 최신 무기였고, 약점도 분명했다. 조종 신호의 주파수를 적이 찾아내 흔들면 어뢰는 그대로 빗나갔다. 1937년, 라마는 빈을 떠났다. 다만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하녀에게 약을 먹이고 옷을 바꿔 입고 나왔다는 극적인 탈출담은 1966년에 나온 자서전에 실린 이야기이고, 라마 본인이 뒷날 자서전 내용을 부인했다. 출처가 확실히 뒷받침하는 건 여기까지다. 1937년 라마는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MGM의 루이스 B. 메이어를 만나 계약했다 . 미국으로 가는 배는 노르망디호였다. 배에서 내렸을 때 이름은 헤디 라마로 바뀌어 있었다. 라마가 빈을 떠난 이듬해인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됐다. 라마의 부모는 유대인이었다. 1940년 9월 17일, 대서양 1940년 가을, 미국은 아직 전쟁에 뛰어들기 전이었다. 할리우드에서 라마는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축에 들었다. 9월 17일, 영국 여객선 시티 오브 베나레스호가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대서양에 가라앉았다 . 배에는 공습을 피해 캐나다로 보내지던 아이들이 타고 있었고, 대다수가 돌아오지 못했...

1만 7천 년 그림이 15년 만에 병들었다

1940년 9월 12일, 프랑스 남서부 몽티냑. 열일곱 살 마르셀 라비다가 친구 셋을 데리고 언덕의 좁은 구멍 앞에 섰다. 손에는 급히 만든 기름 등불과 큰 칼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네 소년은 금을 찾으러 온 참이었다. 구멍을 넓히고 라비다가 먼저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발밑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등불을 비추자 보물은 없었다. 대신 벽마다 짐승이 가득했다. 검은 소, 붉은 말, 뿔 달린 사슴. 소년들이 찾아낸 것은 약 1만 7천 년 전, 빙하기의 손이 그린 그림 이었다. 나라가 무너진 여름, 네 소년이 한 마을에 모였다 1940년 9월의 프랑스는 석 달 전 독일에 무너진 나라였다. 6월에 파리가 점령됐고, 사람들은 남쪽으로 흩어졌다. 몽티냑은 그 남쪽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라비다는 마을의 견습 정비공이었고, 열다섯 살 자크 마르살은 같은 마을 소년이었다. 나머지 둘, 조르주 아니엘과 시몬 쿠앙카스는 파리 쪽에서 몽티냑으로 흘러든 피란 소년들이었다. 마을에는 오래된 소문이 있었다. 숲 어딘가에 라스코 저택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고, 그 끝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였다. 며칠 전 라비다가 언덕에서 구멍 하나를 발견했을 때, 소년들이 떠올린 것도 이 보물 소문이었다. 구멍을 발견한 나흘 뒤, 라비다는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그 언덕으로 돌아왔다 . 개가 구멍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발견자가 부인했다 라스코 발견담에서 가장 널리 퍼진 장면은 개다. 로보라는 이름의 개가 구멍에 빠졌고, 소년들이 개를 꺼내려다 동굴을 찾았다는 이야기. 지금도 여행 안내판이 즐겨 옮기는 대목이다. 그런데 정작 발견자 라비다는 훗날 개 이야기를 부풀린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문화부의 공식 기록 도 그 구멍이 개가 아니라, 뽑혀 나간 나무가 남긴 자리였다고 적는다. 널리 퍼진 전설과 발견자 본인의 회고가 어긋나는 자리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니게임 ▶ Google Play에서 설치...

1분 뒤 도스토옙스키는 죽을 예정이었다

1849년 12월 22일 아침, 페테르부르크 세묘놉스키 연병장. 스물여덟 살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사형 선고문을 들었다. 죄수들은 십자가에 입을 맞췄고, 머리 위에서 칼이 부러졌다. 그리고 흰 셔츠가 입혀졌다. 흰 셔츠는 수의였다. 죄수들은 세 명씩 호명됐다. 도스토옙스키는 여섯 번째, 두 번째 조였다. 첫 세 사람이 기둥에 묶였고, 병사들이 총을 들었다. 같은 날 저녁 도스토옙스키는 형 미하일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살아 있을 시간은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고. 사람은 마지막 1분을 어디에 쓰는가. 1849년 12월 22일 아침, 도스토옙스키 앞에 남은 질문은 하나였다. 왜 1849년이었나 한 해 전인 1848년 2월, 파리에서 왕 루이 필리프가 쫓겨났다 . 혁명은 빈과 베를린으로 번졌다. 니콜라이 1세는 국경 너머에서 왕좌들이 흔들리는 광경을 지켜봤다. 1848년 4월 2일, 니콜라이 1세가 비밀 위원회 하나를 세웠다 . 위원장은 드미트리 부투를린이었고, 위원회는 검열관들을 감독했다. 위원회가 살핀 것은 광장의 연설이 아니라 인쇄되는 문장이었다. 같은 무렵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금요일 저녁마다 미하일 페트라솁스키의 집에 사람들이 모였다. 프랑스 사람 샤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읽었고, 농노제와 검열을 이야기했다. 페트라솁스키의 금요일 자리에 도스토옙스키가 앉아 있었다. 1846년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로 데뷔한 신인이었다. 죽은 비평가의 편지 《가난한 사람들》을 극찬해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을 문단에 박아 넣은 사람은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였다. 1847년 여름, 요양지 잘츠브룬에서 벨린스키는 소설가 고골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 고골이 교회와 황제에 대한 복종을 설교한다고 벨린스키는 규탄했다. 러시아에 지금 가장 절실한 문제는 농노제의 폐지, 태형의 폐지, 그리고 이미 있는 법이나마 최대한 엄격히 지키는 것이다. —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가 고골에게 보낸 편지 편지는 러시아에서 인쇄될 수 없었고,...

전구 25만 개, 에디슨은 안 팔았다

1893년 5월 1일 저녁, 시카고.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단상 위에서 작은 버튼 하나를 눌렀다. 그 순간 박람회장 전체가 한꺼번에 밝아졌다. 전구 수만 개가 동시에 켜지는 걸 처음 본 사람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불을 준비한 사람은 발명가 에디슨이 아니었다. 조지 웨스팅하우스라는 사업가였고, 그가 켠 전구는 정작 에디슨 쪽에서 한 개도 사지 못한 것들이었다. 박람회를 밝힐 전구를, 그걸 만들 특허를 쥔 회사가 팔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기에도 전쟁이 있었다 에디슨은 1879년에 백열전구를 세상에 내놨다. 불을 밝히는 건 풀었는데, 그 전기를 멀리 보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에디슨이 고른 직류는 발전소에서 1마일 남짓만 가도 힘이 빠졌다. 도시 하나를 밝히려면 몇 블록마다 발전소를 새로 세워야 했다. 웨스팅하우스는 다른 길을 봤다. 교류는 전압을 높였다 낮췄다 하며 수십 마일을 건너갈 수 있었다 . 교류를 실제로 돌릴 심장은 니콜라 테슬라가 설계한 다상 교류 방식이었고, 웨스팅하우스는 그 특허를 사들여 회사의 무기로 삼았다. 여기서부터가 흔히 전류 전쟁(War of the Currents) 이라 불리는 싸움이다. 에디슨 쪽은 교류를 위험한 전기로 몰았다. 개와 말을 교류로 감전시켜 죽이는 시연을 열었고, 1890년에는 교류를 쓴 전기의자로 첫 사형이 집행됐다 . 다만 이 감전 시연을 앞장서 벌인 건 에디슨 본인이라기보다 그와 손잡은 해럴드 브라운이라는 인물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에디슨은 뒤에서 실험실과 이름값을 빌려줬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이겼는데, 켤 전구가 없었다 1892년, 박람회를 밝힐 회사를 뽑는 입찰이 열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4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 세계가 지켜볼 무대였다. 에디슨 쪽 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이 처음엔 훨씬 높게 불렀다가 55만 4천 달러까지 낮췄다. 웨스팅하우스는 39만...

분수는 다 같이 켜진 적이 없다

1664년 5월 7일 저녁, 베르사유. 루이 14세가 손님 600명을 새 정원으로 불러들였다. 사람들이 들어서는 순간, 정원의 분수란 분수가 한꺼번에 물을 뿜어 올렸다. 베르사유에서 벌인 첫 대형 잔치 의 개막이었다. 그 자리에 선 누구도 발밑의 사정 하나는 몰랐을 것이다. 베르사유는 분수에 댈 물이 늘 모자란 땅이었다. 늪과 모래뿐인 자리 에 세운 정원이었으니, 물기둥을 한꺼번에 올린다는 건 그 자체로 무리였다. 그런데도 그날 저녁, 분수는 멈추지 않았다. 정원을 가득 채운 그 물은 어디서 왔을까. 물이 가장 귀한 곳에, 가장 많은 분수를 1661년, 스물둘의 루이 14세가 직접 나라를 쥐었다. 친정을 시작한 젊은 왕 은 소란한 파리에서 멀찍이, 아버지의 사냥 별장이 있던 늪지 베르사유를 자기 무대로 골랐다. 어린 시절 파리에서 겪은 귀족들의 소요가 그를 도시 밖으로 밀어냈다는 해석이 오래전부터 따라붙는다. 같은 해, 정원 설계자 앙드레 르노트르가 땅을 갈기 시작했다 . 루이 14세는 정원을 물로 채우라 했다. 흙은 깎아 옮기면 되고 나무는 심으면 그만이었지만, 물은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재료였다. 물을 마음대로 부린다는 건, 곧 자연을 부린다는 과시였다. 가장 귀한 물을 가장 헤프게 쓰는 정원만큼 왕의 힘을 또렷이 보여 주는 무대도 없었다. 치세가 저물 무렵 베르사유의 물줄기는 1,600개에 이르렀다 . 지금 남은 것의 네 배다. 분수가 늘수록 물은 더 모자랐다. 늪 위에 세운 정원이, 유럽에서 물을 가장 많이 쓰는 곳이 되어 갔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니게임 ▶ Google Play에서 설치 🎬 영상으로 보기 강 하나를 통째로 옮기려 한 왕 1681년, 루이 14세가 센강 물을 길어 올리기로 했다. 강가에 들어선 마를리 기계 는 물레바퀴 14개로 펌프 250여 개를 돌렸다. 퍼 올린 물은 150미터 높이 까지 밀려 올라갔다. 당대에 사람이 만든 가장 거대한 기계였다. ...

퀴리의 공책은 납에 갇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하. 한 연구자가 장갑을 끼고 각서에 서명을 한다. 보호장비를 갖춘 다음에야 상자가 열린다. 안에 든 것은 낡은 공책 한 권. 마지막으로 글씨가 적힌 것은 90여 년 전이다. 그래도 공책에서는 아직 방사선이 나온다. 공책의 주인은 마리 퀴리다. 화학 노트였다.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맨손으로는 넘길 수 없다 . 왜 한 사람의 공책이 한 세기가 지나도록 위험할까. 답은 마리 퀴리가 평생 쫓은 가루 한 줌에 있다. 빛나는 가루를 쫓은 사람 1898년 파리. 비가 새는 낡은 창고에서 두 사람이 우라늄 광석을 끓였다. 한 사람은 피에르 퀴리, 다른 한 사람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온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 곧 마리 퀴리였다. 마리 퀴리가 떠나온 폴란드는 그때 지도에 없었다.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나라를 셋으로 갈라 가진 지 100년이 넘던 때였다. 두 사람은 그해 새로운 원소 둘을 세상에 알렸다 . 하나는 폴로늄. 마리 퀴리가 지도에서 사라진 조국의 이름을 붙였다. 다른 하나가 라듐이었다. 라듐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희미하게 빛났다. 라듐을 손에 쥐는 일은 쉽지 않았다. 광석을 수 톤씩 끓여야 가루 한 줌이 나왔다. 흔히 "퀴리가 라듐 0.1그램을 건졌다"고 하지만, 좀 더 정확히는 1902년에 염화라듐 0.1그램을 분리 한 것이었다. 순수한 라듐 금속을 손에 넣은 것은 다시 8년이 지난 1910년이다. 몇 해 동안 끓인 광석에서 남은 것이 그만큼이었다. 요정의 불빛 라듐을 손에 넣은 마리 퀴리는 라듐을 곁에서 떼지 않았다. 라듐을 담은 시험관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책상 서랍에도 두었다 . 밤이 되면 작업실로 갔다. 선반 위에 늘어선 시험관들이 스스로 푸르스름하게 빛을 냈다. 밤에 작업실에 들어가면 사방에서 시험관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빛나는 시험관들은 마치 요정의 불빛 같았다. 이 문장은 마리 퀴리가 1923년에 쓴 남편 피에르의 전기에 남아 있다 . 마리 퀴리는 라듐을 곁에 두는...

칼은 살을 찌른 적이 없다

1959년 12월, 할리우드의 한 촬영장. 욕실 세트 하나가 일주일 동안 세워졌다 뜯기기를 반복했다. 12월 17일부터 23일까지 , 앨프리드 히치콕은 단 45초짜리 장면 하나를 찍었다. 그 45초를 위해 카메라를 78번 다시 놓았다. 칼이 여자의 몸을 찌르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완성된 45초는 영화사에서 가장 무서운 살인 장면으로 남았다. 칼날이 살을 가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채로. 정점에 있던 거장의 초라한 선택 1959년의 히치콕은 정점에 있었다. 〈현기증〉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막 끝낸 참이었다. 큰 예산, 컬러 필름, 대형 스타가 보장된 자리였다. 그런데 히치콕은 다음 영화 〈사이코〉를 반대로 갔다. 흑백으로, 텔레비전 시리즈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을 찍던 자기 TV 촬영팀과 함께, 싸게 찍기로 했다. 거장의 선택치고는 초라했다. 더 이상한 결정이 따로 있었다. 관객이 주인공이라 믿고 따라온 여자, 마리온 크레인을 영화가 절반도 지나기 전에 죽이기로 한 것이다. 간판 스타가 중반에 사라지는 건 당시 영화에 없던 일이었다. 히치콕은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극장에 상영 도중 입장을 막는 규칙 까지 요구했다. 마리온이 죽은 뒤 들어온 관객은, 누가 주인공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보여주지 않기로 한 결정 1959년의 미국 영화에는 제작 규정이 있었다. 알몸도, 칼이 살에 박히는 장면도 화면에 그대로 담을 수 없었다. 히치콕은 이 제약을 정면으로 받는 대신 거꾸로 이용했다 . 히치콕은 살인을 한 덩어리로 찍지 않았다. 짧은 조각으로 잘게 쪼갰다. 칼, 비명, 흐르는 물, 손, 타일. 조각 하나하나는 검열관이 트집 잡을 게 없었다. 그런데 빠르게 이어 붙이자, 나머지는 관객의 머릿속이 알아서 채웠다. 칼날과 살갗이 한 화면에 같이 담긴 적은 끝내 없었다. 히치콕은 훗날 프랑수아 트뤼포와의 대담에서 자기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관객을 연출하고 있었다. 오르간을 연주하듯 관객을 다뤘다고 해...

못 듣고 쓴 곡이 우주로 날아갔다

1824년 5월 7일 밤,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음이 사라지자 객석이 일제히 일어섰다. 손수건이 공중에서 흔들렸고, 모자가 날아올랐다. 그런데 무대 한가운데의 베토벤은 객석을 등진 채 악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수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알토 가수 한 사람이 다가가 베토벤의 어깨를 잡고 몸을 객석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제서야 베토벤은 자기가 만든 음악에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이 장면은 9번 교향곡 초연을 기록한 자료 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베토벤을 돌려세운 가수가 누구였는지는 카롤리네 웅거였다는 기록이 가장 널리 통한다. 쉰셋의 베토벤에게 남은 시간은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3년 동안 베토벤이 가장 깊이 매달린 것은, 수백 명이 연주하는 교향곡이 아니라 단 네 사람이 연주하는 가장 작고 사적인 음악이었다. 소리가 닿지 않는 사람의 선택 베토벤의 귀는 30대부터 서서히 어두워졌다. 1822년 무렵에는 오케스트라의 총주도, 가득 찬 홀의 박수도 더는 닿지 않는 상태였다. 사람들은 작은 수첩에 글을 적어 베토벤과 대화했다. 음악사학자들이 '대화 수첩(conversation books)'이라 부르는 이 노트는 지금도 상당량이 남아, 들리지 않게 된 작곡가가 세상과 주고받은 말을 그대로 전한다. 그 침묵 속으로 멀리 러시아에서 편지 한 통이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갈리친 공작이 현악 4중주를 주문하며, 사례는 베토벤이 정하는 대로 치르겠다고 적었다. 베토벤은 받아들였다. 베토벤이 생애 마지막에 쓴 후기 현악 4중주들 은 이렇게 시작됐다. 현악기 네 대는 당대 음악에서 사람 목소리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던 편성이었다. 방금 끝낸 9번 교향곡이 수백 명이 모인 큰 홀의 함성이었다면, 베토벤이 이제 택한 것은 네 사람이 방 하나에서 나누는 조용한 대화였다. 들리지 않는 사람이 가장 섬세한 음악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다. 베토...

달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찍은 사람이 없다

1969년 7월 20일, 고요의 바다. 한 우주인이 금빛 가리개를 내린 채 카메라 쪽으로 서 있다. 두 다리를 약간 벌리고, 한쪽 팔은 들린 채다. 인류가 달에서 가져온 사진 가운데 가장 많이 인쇄되고 가장 많이 걸린 한 장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사진 속 인물을 닐 암스트롱이라고 기억한다. 달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니까. 그런데 사진 속 우주인은 암스트롱이 아니라, 두 번째로 내려선 버즈 올드린 이다. 암스트롱은 이 사진 어디에도 또렷이 서 있지 않다. 그는 셔터를 누른 쪽이었다. 달 표면으로 나간 카메라는 한 대였다 아폴로 11호의 두 사람이 달 표면에 머문 시간은 두 시간 반 남짓이었다. 그 시간 동안 두 사람이 들고 나간 사진 카메라는 스웨덴제 핫셀블라드 한 대뿐이었다. 가슴에 거는 방식이라 손은 자유로웠지만, 뷰파인더가 없어 감으로 겨눠 찍어야 했다. 한 대뿐인 카메라를 거의 내내 든 사람은 사령관 암스트롱이었다. 임무 계획서가 그렇게 정해 두었다. 사령관이 표면 활동을 기록하고, 동료는 실험 장비를 설치한다. 그래서 셔터를 누르는 쪽은 늘 암스트롱이었고, 렌즈 앞에 서는 쪽은 늘 올드린이었다. 그날 달에서 찍힌 사진 122장은 대부분 올드린과 달의 풍경이다. 그는 찍히는 대신 찍는 쪽을 택했다 암스트롱은 카메라를 좀처럼 놓지 않았다. 성조기 앞의 올드린을 찍고, 지진계를 내려놓는 올드린을 찍고, 착륙선 이글의 다리를 찍었다. 두 사람이 사진을 바꿔 든 시간은 길지 않았다. 표면을 떠나기 직전, 암스트롱은 착륙선에서 약 60미터 떨어진 작은 분화구까지 혼자 빠르게 걸어갔다 돌아왔다. 훗날 리틀 웨스트 분화구 라 불린 자리다. 아폴로 11호의 두 사람이 착륙선에서 가장 멀리 나간 순간이었는데, 거기서도 그의 손에 들린 건 카메라였다. 그는 분화구 가장자리를 빙 둘러 파노라마 를 찍었다. 자기 모습을 남기는 데에는 그 시간을 쓰지 않았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쌤 1인 과외 학생관리 · 메모 한 줄로 수업료 청구 자동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