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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드럼통이 차가 되었다

1955년, 서울 종로의 한 정비소. 정비공 최무성과 두 동생이 미군이 버리고 간 드럼통을 망치로 두드려 폈다. 둥글게 말린 기름통이 판판하게 펴지자, 그 철판이 자동차의 옆판이 됐다. 엔진은 미군 지프에서 떼어내 되살렸다. 시중에 없는 부품은 공작기계로 하나씩 깎았고, 도면이라 할 것도 변변찮았다. 그렇게 넉 달 을 두드려 차 한 대가 나왔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람 손으로 만들어낸 자동차, 이름은 ‘시발(始發)’이었다. 차를 만드는 나라가 아니었다 1955년의 한국에는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이 없었다. 전쟁이 멈춘 지 두 해, 거리를 굴러다니는 차는 대개 미군이 쓰다 버린 지프였다. 고장 난 지프가 오면 고쳐서 다시 굴렸고, 버려진 드럼통은 지붕이 되고 담장이 되고 밥그릇이 됐다. 남는 것을 되살려 쓰는 일이 그 시절의 산업이었다. 최무성은 종로에서 바로 그 미군 지프를 고치는 정비소를 했다. 뜯고 맞추기를 여러 해 반복하는 사이, 부품 하나하나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손끝에 익었다. 고치는 일이 쌓이자 머릿속에 다른 그림이 생겼다. 엔진을 되살리고 껍데기를 새로 만들면, 남의 차가 아니라 자기 차 한 대가 통째로 나온다. 정비소가 공장이 되다 1955년, 최무성은 두 동생 최혜성·최순성과 함께 정비소 문을 자동차 공장으로 바꿨다. 회사 이름은 국제차량제작 . 남의 차를 고치던 자리에서 자기 차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가장 큰 벽은 철판이었다. 몸체를 찍어낼 철판이 없으니, 삼형제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구해다 망치로 펴서 옆판을 만들었다. 지프에서 떼어낸 엔진과 변속기를 되살려 얹고, 실린더 헤드처럼 시중에 없는 부품은 공작기계로 깎았다. 이렇게 손으로 두드려 한 대를 완성하는 데 넉 달이 걸렸다. 완성된 차에 삼형제는 ‘시발’이라 이름 붙였다. 始發, 첫 출발이라는 뜻이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쌤 1인 과외 학생관리 · 메모 한 줄로 수업료 청구 자동 생성 ▶ Google Pl...

일본 경찰이 소화제 약방 주인을 끌고 갔다

1919년 10월 31일 새벽, 서울 순화동. 일본 경찰이 약방 하나를 덮쳤다. 끌려간 사람은 서른여섯의 민강. 체하고 얹힌 사람들에게 물약 한 병을 팔던 가게의 주인이었다. 가게 이름은 동화약방, 물약 이름은 활명수. 목숨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이었다. 소화제를 파는 가게였는데, 경찰은 약을 찾고 있지 않았다. 궁 안에 있던 약, 궁 밖에서 앓던 사람들 활명수를 만든 사람은 민강의 아버지 민병호였다. 민병호는 궁중 선전관이었다. 임금 가까이에서 명령을 전하던 무관 자리이자, 궁중의 처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1890년대 조선에서 급체와 토사곽란은 흔한 병이었다. 배를 움켜쥐고 앓아도 집에서 달여 먹는 탕약 말고는 마땅한 약이 없었다. 약은 궁 안에 있었고, 사람들은 궁 밖에서 앓았다. 민병호는 궁중 비방에 서양 의학 지식을 붙여, 달이지 않고 병째로 마시는 물약을 만들었다. 1897년 9월 25일, 순화동 5번지 자기 집에 동화약방을 열었다 . 활명수를 한국 최초의 신약 이라 부르는 관행이 여기서 나왔다. 다만 이 표현은 회사와 언론이 함께 써 온 말이고, '신약'의 기준 자체가 느슨하다는 점은 감안해 두는 편이 정확하다. 값은 쌌던 적이 없다. 1910년대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 설렁탕 두 그릇 값이었다 . 그런데도 팔렸고, 팔린 만큼 베껴졌다. 이름만 조금씩 바꾼 유사품이 60여 종 깔렸다. 동화약방은 1910년 8월 15일 부채표를 특허국에 등록했다 . 이름을 지키려고 붙인 표시였다. 약방이 돈이 지나가는 길목이 됐다 1919년 3월 만세시위가 지나가고,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섰다. 서울에서도 4월 23일 정오 종로에서 국민대회가 열렸다. 민강은 준비자금의 출납을 맡았다 . 천도교 대표 안상덕과 기독교 대표 현석칠이 각각 600원씩 대기로 했고, 자금은 동화약방을 거쳐 가기로 정해졌다. 4월 20일, 민강은 안상덕이 가져온 500원을 김유인에게 넘겼다. 약방을 거쳐 간 500원으로 「국민대회...

한 글자가 법을 바꿨다

마트 라면 칸에서 제일 눈에 띄는 봉지는 대개 붉다. 그 붉은 봉지 한가운데에는 한글도 그림도 아닌 한자 한 글자가 있다. 辛. 매울 신.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라면의 이름이 이 한 글자다. 그런데 1986년 규정으로는, 라면 봉지에 한자를 한글보다 크게 넣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그 큰 辛은, 법이 한 번 바뀐 다음에야 봉지에 앉을 수 있었다. 라면 이름 하나가 시행규칙을 건드린 이야기다. 1위가 0.8퍼센트포인트였을 때 한국에서 라면은 오랫동안 삼양이었다. 1963년 삼양이 첫 라면을 내놓은 뒤로 20년 넘게, 라면 1위 자리는 삼양라면의 것이었다. 농심은 오래 그 자리를 넘봤지만 벽은 두꺼웠다. 판이 뒤집힌 건 1985년이었다. 너구리·안성탕면·짜파게티로 라인업을 두껍게 쌓아 온 농심 이, 그해 시장점유율 40.4퍼센트로 삼양(39.6퍼센트)을 처음 넘어섰다 . 다만 격차는 0.8퍼센트포인트. 언제 다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은 차이였다. 당시 농심을 이끈 사람은 창업주 신춘호였다. 1965년 라면 사업을 시작했고, 1978년 형 신격호와 갈라서며 '롯데'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회사 이름을 농심으로 바꾼 사람이다. 롯데라는 간판을 형에게 두고 나온 신춘호에게, 농심은 처음부터 자기 이름으로 세운 회사였다. 20년 넘게 삼양에 눌려 있던 그 회사가 삼양을 겨우 0.8퍼센트포인트 앞선 참이었다. 신춘호는 이 자리를 굳히고 싶었다. 매운 라면, 그리고 한 글자 1986년, 농심이 새 라면을 준비했다. 얼큰한 소고기 국물이었다. 그때 한국 라면은 대체로 순한 맛이었는데, 농심은 반대로 갔다. 맵게. 이름을 두고 신춘호가 한자 한 글자를 내밀었다. 辛, 매울 신. 매운맛을 한 글자에 담을 수 있고, 발음이 짧아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였다. 경영진은 말렸다. 한자는 소비자에게 생소하고 딱딱하다는 것, 봉지에 큰 한자를 넣으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는 것이었다. "매운 라면이니까 辛라면으로 하자....

서로의 과자를 맞바꿔 베꼈다

카스타드 원조는 롯데, 초코파이 원조는 오리온. 두 회사가 대표 과자를 서로 맞바꿔 베낀 거라고. 노란 상자, 두 개 편의점 과자 매대에 노란 상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왼쪽은 롯데, 오른쪽은 오리온. 만든 회사가 다른데 이름이 똑같다. 둘 중 하나는 원조를 그대로 베꼈다. 문제는 베낀 쪽이 어디냐다. 초코파이는 오리온이 먼저였다 1970년대, 오리온과 롯데는 한국 제과의 두 거인이었다. 매대 한 칸을 두고 서로를 이기려는 라이벌. 1974년, 오리온이 초코파이를 만들었다. 둥근 빵에 마시멜로를 넣고 겉을 초콜릿으로 입힌 과자였다. 이름부터 오리온이 붙였다. 1976년, 오리온이 초코파이를 상표로 등록했다. 자기가 만든 이름이니 자기 것이라고 여겼다. 1978년, 롯데가 똑같은 이름의 초코파이를 내놓았다. 이듬해 롯데는 초코파이를 상표로까지 등록했다. 오리온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먼저 붙인 이름을 남이 등록하는데도 그냥 두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니게임 ▶ Google Play에서 설치 🎬 영상으로 보기 카스타드는 롯데가 먼저였다 1986년, 일본 롯데가 카스타드를 만들었다. 계란 크림, 곧 커스터드를 넣은 부드러운 케이크였다. 크림이 노랬고, 상자도 노랬다. 1989년, 한국 롯데가 카스타드를 들여왔다. 카스타드만큼은 롯데가 원조였다. 당시 오리온에는 카스타드가 없었다. 그리고 2004년, 오리온이 카스타드를 내놓았다. 롯데 카스타드와 똑같은 이름으로, 15년이나 늦게. 초코파이를 남에게 내준 오리온이, 카스타드는 남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초코파이는 오리온이 먼저, 카스타드는 롯데가 먼저. 두 회사는 상대의 대표 과자를 정확히 맞바꿔 베꼈다. 이름은 아무도 갖지 못한다 1997년, 오리온이 뒤늦게 법원으로 갔다. 롯데가 등록해 둔 초코파이 상표를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이었다. 먼저 만든 이름이니 돌려받겠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오리온의 손을 들지 않았...

한국 차의 얼굴은 이탈리아가 그렸다

1973년 봄, 이탈리아 토리노. 한국에서 온 한 남자가 자동차 디자인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현대자동차의 첫 사장 정세영이었다. 손에 든 건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계획 하나였다. 그런데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이라는 차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디자인은 이탈리아, 엔진은 일본, 핵심 기술자는 영국. 한국이 직접 만든 부분이 어디인지 한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도 포니는 한국 자동차 역사의 첫 줄에 적힌다. 빌려온 조각으로 짜맞춘 차가 어떻게 '국산차 1호'가 됐을까. 빌려 쓰던 나라 1970년대 초, 한국 도로를 달리던 차는 거의 다 빌려온 차였다. 외국 회사의 설계를 들여와 한국에서 조립한 것들이었다. 자동차를 '만든다'기보다 '조립한다'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현대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포드의 코티나를 들여와 울산에서 조립하고 있었다. 현대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려 했다. 포드와 더 깊이 손잡고, 부품을 한국에서 만들고, 합작 회사를 세우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협상은 부품 국산화와 기술 이전의 폭을 놓고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여러 해를 끌던 끝에 합작은 1973년 끝내 깨졌다 . 빌리지 말고, 만든다 포드가 떠난 자리에서 현대는 갈림길에 섰다. 다른 회사의 차를 다시 빌려 조립하느냐, 아니면 현대의 차를 만드느냐. 현대를 세운 정주영은 빌린 차를 조립하는 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고유 모델을 가져본 적 없는 회사가, 만드는 쪽을 택했다. 그 결정을 떠안은 사람이 정주영의 동생이자 현대차 초대 사장이던 정세영 이었다. 정세영이 직접 토리노로 건너간 게 이 무렵이다. 토리노의 이탈디자인에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포니의 얼굴을 맡았다. 설계 도면과 시제품 값으로 치른 돈은 120만 달러 였다. 얼굴은 샀다. 그런데 주지아로의 도면대로 차를 실제로 만들 사람이 현대에는 없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

맥주가 물을 팔아 1위가 됐다

1993년 봄, 거실의 TV에서 맥주 광고가 흘러나왔다. 30초짜리였다. 그런데 화면에 맥주가 비친 건 마지막 3초뿐이었다. 나머지 27초 동안 흐른 것은 물이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다는 물. 맥주를 만드는 회사가 광고에서 맥주를 치우고 물을 내세웠다. 40년 가까이 줄곧 2등이던 조선맥주였다. 그리고 3년 뒤, 조선맥주는 1등이 됐다. 술 회사가 '물 맛'으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맥주 맛이 아니라 물을 앞세워서. 1933년, 두 맥주가 같은 출발선에 섰다 1933년, 한반도에 맥주 회사 두 곳이 나란히 세워졌다. 한 곳은 조선맥주, 다른 한 곳은 훗날 OB가 되는 동양맥주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회사 는 같은 출발선에 있었다. 해방과 전쟁을 지나는 사이 한쪽이 앞서 나갔다. 동양맥주의 OB였다. 1990년대 초가 되자 OB의 시장 점유율은 70%를 넘었고, 조선맥주는 그 절반에도 닿지 못했다. 조선맥주는 1967년부터 박경복 회장이 이끌었지만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맥주 맛으로 정면에서 부딪쳐선 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1991년, 박경복의 아들 박문덕이 조선맥주 사장으로 취임했다 . 40년 가까이 굳어 있던 2등의 자리를 물려받은 셈이었다. 박문덕은 맥주 대신 물을 팔기로 했다 1993년은 조선맥주 창립 60주년이었다. 사장이 된 지 2년 만에, 박문덕은 정면 승부를 버렸다. 맥주 맛으로 OB를 넘는 길을 접고 다른 것을 팔기로 했다. 물이었다. 조선맥주는 지하 150미터에서 끌어올린다는 천연 암반수를 앞세웠다. 제품 이름부터 물에서 나왔다. '하이트(hite)'는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올린다는 영어 'height'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광고 카피도 맥주가 아니라 물을 말했다. 100% 천연수로 만든 순수한 맥주, 하이트. — 하이트 런칭 광고(1993) 광고의 구성도 거꾸로였다. 30초 가운데 맥주가 비친 건 마지막 3초, 나머지 27초는 물이 흘렀다...

산도, 오븐부터 손으로 만들었다

1961년, 서울 중림동. 윤태현이 자기 손으로 짜 올린 오븐 앞에 섰다. 비스킷 만드는 기계가 이 나라에 한 대도 없던 때였다. 오븐에서 크림을 끼운 과자 한 장이 나왔다. 이름은 크라운산도였다. 누구나 한 번쯤 입에 넣어 본 과자다. 그런데 이 과자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그리고 '산도'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과자다운 과자는 부대 담장 밖에 있었다 해방 직후, 한국에서 버터 향이 나는 과자는 거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것뿐이었다. 국내에는 비스킷을 굽는 기술 자체가 없었다. 단맛이 도는 과자는 늘 담장 너머에 있었고, 그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이 보통 사람의 몫이었다. 윤태현이 서울 중림동에 작은 과자점을 낸 건 1947년이다. 처음 간판은 영일당제과였다. 그러다 1956년에 가게 이름을 크라운제과로 바꿨다 . 외국 과자를 구경만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그걸 넘어설 국산 비스킷을 직접 만들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무렵이었다. 오븐도, 크림 기계도 손으로 짰다 마음만으로 비스킷이 구워지지는 않았다. 우선 오븐이 있어야 했는데, 시중에 살 만한 오븐이 없었다. 윤태현은 미군 기지와 몇 안 되는 과자 공장을 기웃거리며 어깨너머로 기계의 생김새를 익혔고, 긴 터널식 오븐을 손으로 짜 올렸다. 굽는 문제가 풀리자 더 까다로운 벽이 남았다. 비스킷 두 장 사이에 크림을 똑같은 양으로 끼우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해 주는 기계 역시 어디서도 살 수 없었다. 윤태현은 크림을 자동으로 짜 넣는 충전기까지 직접 만들었다. 그렇게 196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크림을 끼운 비스킷 이 나왔다. 이름이 크라운산도였다. 본국에서 보급품 과자가 꼬박꼬박 들어오던 미군들조차 크라운산도를 더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급 과자의 원조' 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즈음이다. 얼마나 팔렸는지는 숫자보다 셈법을 보는 편이 정직하다. 회사 셈으로는 그동안 전 국민이 한 사람당 평균 쉰 개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