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가 법을 바꿨다
마트 라면 칸에서 제일 눈에 띄는 봉지는 대개 붉다. 그 붉은 봉지 한가운데에는 한글도 그림도 아닌 한자 한 글자가 있다. 辛. 매울 신.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라면의 이름이 이 한 글자다.
그런데 1986년 규정으로는, 라면 봉지에 한자를 한글보다 크게 넣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그 큰 辛은, 법이 한 번 바뀐 다음에야 봉지에 앉을 수 있었다. 라면 이름 하나가 시행규칙을 건드린 이야기다.
1위가 0.8퍼센트포인트였을 때
한국에서 라면은 오랫동안 삼양이었다. 1963년 삼양이 첫 라면을 내놓은 뒤로 20년 넘게, 라면 1위 자리는 삼양라면의 것이었다. 농심은 오래 그 자리를 넘봤지만 벽은 두꺼웠다.
판이 뒤집힌 건 1985년이었다. 너구리·안성탕면·짜파게티로 라인업을 두껍게 쌓아 온 농심이, 그해 시장점유율 40.4퍼센트로 삼양(39.6퍼센트)을 처음 넘어섰다. 다만 격차는 0.8퍼센트포인트. 언제 다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은 차이였다.
당시 농심을 이끈 사람은 창업주 신춘호였다. 1965년 라면 사업을 시작했고, 1978년 형 신격호와 갈라서며 '롯데'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회사 이름을 농심으로 바꾼 사람이다. 롯데라는 간판을 형에게 두고 나온 신춘호에게, 농심은 처음부터 자기 이름으로 세운 회사였다. 20년 넘게 삼양에 눌려 있던 그 회사가 삼양을 겨우 0.8퍼센트포인트 앞선 참이었다. 신춘호는 이 자리를 굳히고 싶었다.
매운 라면, 그리고 한 글자
1986년, 농심이 새 라면을 준비했다. 얼큰한 소고기 국물이었다. 그때 한국 라면은 대체로 순한 맛이었는데, 농심은 반대로 갔다. 맵게.
이름을 두고 신춘호가 한자 한 글자를 내밀었다. 辛, 매울 신. 매운맛을 한 글자에 담을 수 있고, 발음이 짧아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였다. 경영진은 말렸다. 한자는 소비자에게 생소하고 딱딱하다는 것, 봉지에 큰 한자를 넣으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는 것이었다.
"매운 라면이니까 辛라면으로 하자." — 신춘호, 1986
신춘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름은 辛 한 글자로 정해졌다. 그런데 봉지에 辛을 크게 넣으려는 순간, 진짜 벽이 나타났다. 회사 안이 아니라 회사 밖, 법이 세워 둔 벽이었다.
봉지가 아니라 법을 고쳤다
1986년 당시 식품위생법에는 포장지 표기에 관한 규정이 있었다. 포장지의 한자나 외국어는 한글보다 작게 써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辛을 봉지에 크게 넣는 것 자체가 규정 위반이었다.
보통이라면 봉지 디자인을 규정에 맞춰 줄였을 것이다. 신춘호가 택한 길은 반대였다. 봉지가 아니라 규정을 고치는 것. 1986년부터 농심은 담당 부처인 보건사회부에 규정을 바꿔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요청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라면 봉지의 글자 크기 하나를 두고, 농심은 1988년까지 부처 문을 두드렸다. 글자 하나를 크게 쓰겠다는 일에 2년이 걸린 셈이다.
규정이 실제로 바뀐 건 1988년 10월, 식품위생법 시행규칙 개정이었다. 한자도 한글과 같은 크기로 쓸 수 있게 됐다. 辛이 봉지에서 한글만큼 커진 건 그 뒤였다. 라면 이름 한 글자를 크게 쓰겠다는 고집이, 규칙 한 줄을 바꿔 놓은 셈이다.
매울 신, 그리고 성(姓) 신
신라면은 1991년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라면이 됐고, 그 자리는 지금도 그대로다. 40.4 대 39.6으로 아슬아슬하던 1위는, 매운 한 글자로 굳어졌다.
봉지의 辛은 '맵다'는 뜻이다. 동시에 辛은 신라면을 만든 신춘호의 성(姓)과 같은 글자다. 매운맛을 뜻하려 고른 한 글자가, 마침 창업주의 성과 겹쳤다. 그래서 '신라면의 신은 창업주 성을 딴 것'이라는 말이 오래 따라다녔다. 다만 농심이 내세운 작명 이유는 어디까지나 매운맛이었고, 두 뜻이 한 글자에서 우연히 만난 것에 가깝다.
매운맛을 뜻하는 한 글자를 라면 이름에 걸고, 농심은 글자 크기 규칙까지 바꿨다. 마트 라면 칸의 그 큰 辛은, 법이 한 번 바뀐 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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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캠페인인사이트 — 디자인 위해 법 바꾼 농심 신춘호 회장의 신념
- 꿈꾸는섬 — 라면 전쟁, 농심은 어떻게 라면시장을 장악했을까
- 식품음료신문 — K-라면 창간특집(농심·삼양 점유율, 신라면 1위)
- 위키백과 — 신춘호(1965 롯데공업, 1978 농심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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