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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기들은 왜 무사했나

1960년 9월, 워싱턴의 미국 식품의약국. 부임한 지 한 달 남짓 된 심사관의 책상에 서류 한 뭉치가 올라왔다. 케바돈이라는 수면제의 판매 허가 신청서였다. 이미 스무 나라 넘게 팔리고 있었고, 부작용은 거의 없다고 적혀 있었다. 통상대로라면 도장을 찍고 두 달이면 끝날 일이었다. 심사관의 이름은 프랜시스 켈시였고, 켈시는 도장을 찍지 않았다. 흔히 이 이야기는 "미국 아기들은 운이 좋았다"로 요약된다. 유럽에서 수많은 아기가 팔다리가 짧은 채 태어난 그 약을, 미국은 용케 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은 기록을 따라가 보면, 그 '운'의 자리에는 신입 심사관 한 명이 1년 넘게 도장을 미룬 시간이 놓여 있다. 그리고 미국이 '완전히' 무사했던 것도 아니다. 스무 나라가 판 약, 심사관은 일곱 명 1960년의 FDA에서 신약 전체를 들여다보던 전임 의사는 일곱 명뿐이었다 . 켈시가 그중 하나였고, 미국 제약사 리처드슨-메렐이 낸 케바돈 서류 는 켈시가 부임 후 맡은 첫 사건에 가까웠다. 당시 법에는 심사관을 압박하는 조항이 하나 있었다. 1938년 식품의약품화장품법상, 신청서가 접수되면 60일이 지날 때 자동으로 효력이 생겼다 . FDA가 그 안에 거부하거나 추가 자료를 요구하지 않으면, 회사는 그냥 약을 팔 수 있었다. 도장을 안 찍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켈시는 60일이 차기 전에 매번 무언가를 다시 물어야 했다. 1942년의 토끼 켈시가 이 약을 처음부터 미심쩍어한 데엔 오래된 실험 하나가 있었다. 1942년 무렵, 시카고 대학. 젊은 켈시는 말라리아 약을 연구하다 임신한 동물이 약을 분해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봤다. 어미 토끼는 약을 훨씬 천천히 분해했고, 뱃속 태아는 아예 분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약이 어미와 태아 사이의 벽, 즉 태반을 넘어간다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 어른에게 안전한 약이 뱃속 아이에게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켈시에게 그것은 배운 지식이 아니라 직접 본...

게이지는 돌아왔지만 게이지가 아니었다

1848년 9월 13일 오후, 미국 버몬트주 캐번디시. 철도 공사장 감독 피니어스 게이지는 스물다섯이었다. 바위에 뚫은 구멍에 화약을 붓고, 쇠막대로 꾹꾹 다지던 참이었다. 불꽃이 튀었고, 화약이 터졌다. 쇠막대는 게이지의 왼뺨 밑으로 들어가 정수리를 뚫고 하늘로 솟았다. 보통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게이지는 몇 분 만에 말을 했다.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오르더니 읍내로 갔다. 담당 의사가 도착했을 때, 게이지는 앉은 채로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 또박또박 설명했다 . 살아난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게이지를 알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돌아온 사람이 게이지가 아니라고 했다.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맡긴 일 그해 뉴잉글랜드의 철도는 바위산을 뚫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바위에 구멍을 내고 화약을 다져 넣는 일은 공사장에서 가장 위험한 축이었다. 조금만 세게 다져도 마찰 불꽃이 화약에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틀랜드·벌링턴 철도 회사가 이 일을 게이지에게 맡긴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고용주들은 게이지를 가장 유능하고 믿을 만한 감독 으로 꼽았고, 거친 인부들 사이에서도 게이지의 평판은 좋았다. 게이지의 머리를 뚫은 쇠막대도 아무 물건이 아니었다. 캐번디시의 대장장이가 게이지의 주문대로 특별히 벼려 준, 길이 1.1미터에 지름 3센티미터, 무게 6킬로그램짜리 다짐봉 이었다. 한쪽 끝은 창처럼 뾰족하게 갈려 있었다. 그 뾰족한 쪽이 왼뺨을 지나 앞이마 안쪽을 관통했다. 사고가 난 날 저녁에도 게이지의 정신은 또렷했다. 그런데 게이지는 친구들을 부르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며칠이면 다시 일하러 나갈 텐데. 1848년 9월, 담당의 존 할로의 진료 기록이 옮긴 게이지의 말이다. 일이 게이지에게 어떤 자리였는지가, 이 한 줄에 다 들어 있다. 몸은 나았지만 자리는 사라졌다 1849년, 게이지의 상처는 아물었다. 왼눈의 시력은 영영 잃었지만, 게이지는 걷고 말하고 손을 쓸 수 있었다. 의학의 눈으로 보면 게이지는 회복한...

죽은 건 헨리에타뿐이었다

1951년 1월, 볼티모어. 서른한 살 여자가 병원 문을 열었다. 의사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답을 받으러 온 것에 가까웠다. 자기 몸 안에 잡히는 멍울을,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헨리에타 랙스. 다섯 아이의 엄마였다. 막내를 갖기도 전부터 사촌들에게 "속에 뭔가 잡힌다"고 말해 왔다( Embryo Project ). 1951년 10월, 헨리에타는 죽었다. 그런데 그 멍울은, 75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다. 담배밭에서 볼티모어까지 헨리에타는 1920년 8월 1일, 버지니아주 로어노크에서 태어났다. 처음 받은 이름은 로레타 플레전트였다고 전한다. 언제 어떻게 '헨리에타'로 불리게 됐는지는 기록이 분명치 않다( Wikipedia ). 어머니를 일찍 여읜 헨리에타는 버지니아 클로버의 친척 집에서 자랐다. 식구들이 나눠 살던 집은 한때 노예들이 머물던 통나무집이었고, 어린 헨리에타는 담배밭에서 일했다( Britannica ). 사촌이던 데이비드 '데이' 랙스와 결혼했고,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일자리를 따라 볼티모어 인근으로 옮겨 갔다. 남편은 제철소에서 일했다. 남부의 담배밭에서 북부의 공장 동네로 향한, 그 시절 흔한 길 하나였다. 흑인을 받아주는 병원이 거기뿐이었다 1950년 11월, 헨리에타는 다섯째 조지프를 낳았다. 출산이 끝나도 멍울은 사라지지 않았다. 1951년 1월 29일, 헨리에타는 존스홉킨스로 향했다( Embryo Project ). 멀어서 마지막으로 고른 게 아니라, 볼티모어에서 흑인을 치료해 주는 큰 병원이 거의 거기뿐이었기 때문이다. 존스홉킨스는 본래 가난한 사람을 위해 세워진 병원이었다. 인종을 이유로 환자를 돌려보내지도 않았다. 다만 1951년의 병동은 그 시대의 규칙대로 흑인과 백인이 나뉘어 있었고( Johns Hopkins Medicine ), 헨리에타가 누운 곳은 '유색인' 병동이었다. 멍울 하나를 보러 도시를 가로질러야 했던 이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