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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무사했다, 사람만 빼고

1872년 12월 5일, 아조레스 제도에서 동쪽으로 740킬로미터쯤 떨어진 대서양. 영국 배 데이 그라티아호의 선원들이 낯선 광경을 봤다. 돛을 일부 편 채,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홀로 흔들리는 배 한 척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올라선 배의 이름은 메리 셀레스트호였다. 선실에는 세간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선창에는 여섯 달 치 식량과 물이 실려 있었다. 화물도 온전했다. 사라진 것은 단 두 가지, 배에 탔던 열 사람과 구명보트 한 척뿐이었다. 남은 기록 앞에 질문은 하나였다. 왜 열 사람이 멀쩡한 배를 두고 사라졌나. 바다에 홀로 뜬 배 배에 가장 먼저 오른 사람은 데이 그라티아호의 일등항해사 올리버 드보 였다. 드보가 갑판에서 확인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배는 물이 새고 있었지만 가라앉을 정도는 아니었고, 조타 장치와 돛 대부분이 멀쩡했다. 선창에 물이 무릎 높이쯤 차 있었으나, 그 물은 배를 위협할 양이 아니었다. 없어진 것은 사람과 보트였다. 갑판 위에는, 배가 발견되기 직전까지 누군가 선창의 물 높이를 재던 막대가 놓여 있었다. 서둘러 배를 버리고 달아난 자리라기엔, 배는 너무 정돈되어 있었다. 값나가는 세간과 선원들의 옷가지, 심지어 선장의 항해 도구 일부까지 그대로였다. 가족을 배에 태운 선장 한 달 전으로 거슬러 간다. 1872년 11월 7일, 뉴욕항. 배의 선장은 벤저민 브릭스, 열 해 넘게 대서양을 오간 뱃사람이었다. 술을 멀리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듣던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 브릭스는 혼자 떠나지 않았다. 아내 세라와 두 살 난 딸 소피아를 함께 태웠다. 긴 바닷길에 어린 가족을 올린다는 건, 그 항해를 그만큼 믿었다는 뜻이었다. 브릭스에게 이 배는 일터이자, 아내와 아이가 함께 잠드는 집이기도 했다. 배 밑 화물칸에는 제노바로 갈 공업용 알코올 1,701통 이 실려 있었다. 출항 전, 브릭스가 뉴욕의 애스터하우스에서 다른 선장과 저녁을 함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주 앉았다는 사람은 데이비드 모어하우스, ...

쿠퍼 옆자리 승무원은 오십 년을 침묵했다

1971년 11월 24일 저녁, 시애틀 활주로.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305편의 계단으로 승객 서른여섯 명이 줄지어 내려갔다. 승무원 두 명도 따라 내렸다. 객실에 남은 사람은 스물두 살 승무원 티나 머클로 한 명, 그리고 검은 넥타이를 매고 붉은 원통과 전선이 든 서류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은 남자였다. 남자는 두 시간 뒤 현금 20만 달러를 몸에 묶고 비행기 뒷계단으로 뛰어내렸다. 미국은 오십 년이 넘도록 남자를 찾지 못했다. 세상이 오십 년 동안 물어온 질문은 하나였다. 그 남자는 누구였고 어디로 갔는가. 물어보지 않은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무원은 왜 오십 년 가까이 입을 열지 않았는가. 먼저, 이름부터 틀렸다 널리 쓰이는 'D.B. 쿠퍼'라는 이름은 납치범이 쓴 이름이 아니다. 포틀랜드 공항에서 현금으로 편도표를 사면서 남자가 적은 이름은 '댄 쿠퍼(Dan Cooper)'였다 . 사건 직후 취재 과정에서 한 기자가 이름을 잘못 옮겼고, 그 착오가 통신사를 통해 퍼지면서 'D.B. 쿠퍼'가 굳었다 . 오십 년 넘게 미국이 부르고 있는 이름은 처음부터 오자였다. 표를 살 때 신분증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71년 미국 국내선에는 승객 검색대가 없었다. 가방을 열어 보이는 절차도, 이름을 대조하는 절차도 없었다. 현금을 내면 표가 나왔고, 그대로 탔다. 미국이 국내선 승객 전원에게 금속탐지기와 소지품 검사를 통과하게 만든 것은 1973년 1월부터다 . 쿠퍼가 뛰어내리고 열네 달 뒤였다. 기장이 막내를 객실로 내려보냈다 이륙 직후, 쿠퍼는 승무원 플로렌스 섀프너에게 쪽지를 건넸다. 섀프너는 읽지 않고 핸드백에 넣었다. 혼자 탄 남자들이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쿠퍼가 몸을 기울여, 쪽지를 읽어보는 편이 좋을 거라고 했다. 가방 안에 폭탄이 있다고 했다. 기장 윌리엄 스콧은 섀프너를 조종실에 붙잡아 두고 쿠퍼의 요구를 받아적게 했다. 대신 객실...

범인은 이미 감옥에 있었다

2019년 9월 18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 연쇄살인의 유력 용의자가 특정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여자 열 명이 죽고, 33년 동안 한 번도 범인이 잡히지 않은 사건이었다. 특정된 남자는 도주 중이 아니었다. 이미 25년째 감옥에 있었다. 1994년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해 무기징역을 받은 부산교도소 수감자, 이춘재였다. 발표 앞뒤로 더 이상한 대목이 드러났다. 화성의 열 건 가운데 아홉 건은 미제로 남아 있었는데, 여덟 번째 사건 하나만은 '범인이 잡힌 사건'으로 처리돼 있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한 뒤 출소한 사람이 이미 세상에 나와 있었다. 2019년 가을, 한 사건에 '범인'이 두 명 존재했다. 한 명은 감옥 안에, 한 명은 감옥 밖에. 205만 명이 못 잡은 다섯 해 첫 사건은 1986년 9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일대에서 일어났다. 1991년 4월 3일 열 번째 사건까지, 다섯 해 동안 여자 열 명이 성폭행당하고 살해됐다. 경찰은 연인원 205만 명을 투입해 용의자 2만 1,280명을 조사하고 지문 4만 116건을 대조했다 . 단일 사건 수사로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진범은 잡히지 않았다. 1986년은 DNA 감정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이었다. 수사는 목격 진술과 혈액형에 기댔다. 당시 수사본부는 현장 증거를 근거로 범인의 혈액형을 B형으로 추정했고, O형이던 이춘재가 조사를 받고도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 33년 뒤 DNA가 내놓은 답 앞에서 보면, 수사의 출발 전제부터 어긋나 있었던 셈이다. 여덟 번째 사건에만 '범인'이 생겼다 1988년 9월 16일 새벽, 여덟 번째 사건이 일어났다. 태안읍의 한 집 안방에서 자고 있던 열세 살 박 양이 성폭행당하고 살해됐다. 앞선 사건들은 전부 바깥이었다. 논둑, 들판, 야산. 집 안은 8차가 처음이었다. 경찰은 수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8차를 연쇄살인에서 떼어내 모...

목소리는 남고, 범인은 사라졌다

1991년 1월 29일 밤.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던 아홉 살 형호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11시, 형호의 집 전화가 울렸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서른 안팎의 남자 목소리였다. 전화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6일 동안 같은 목소리가 형호의 집으로 쉰 번 넘게 걸려왔다 (집계에 따라 예순 번을 넘겼다는 기록 도 있다). 경찰은 통화를 전부 녹음했다. 그런데도 목소리의 주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한국 범죄사에서 화성 연쇄살인, 개구리 소년 실종과 함께 가장 오래 풀리지 않은 사건으로 남은 이름 — 이형호 유괴 살해 사건 이다. 1991년, 쫓을 수 없던 시대 첫 전화에서 남자가 부른 것은 현금 7천만 원과 카폰이 달린 자동차 였다. 1991년 서울에서 7천만 원은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에 가까웠고, 차에 다는 카폰은 부유함의 상징이던 시절이다. 형호의 부모는 시키는 대로 돈을 마련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잡을 방법이었다. 1991년 한국에는 금융실명제가 없었다. 누구나 가짜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 수 있었고, 통장을 쥐고 있어도 주인을 거슬러 올라갈 길이 없었다. 은행 안에 카메라도 거의 없었다. 범인이 돈을 찾으려 한 두 곳의 은행 지점에는 CCTV가 한 대도 없었다 . 가짜 이름 통장이 가능했고, 은행에는 CCTV가 없었고, 범인이 현장에 남긴 물증은 없었다. 범인은 공중전화로만 전화를 걸었다. 발신지를 따라가도 길에 선 전화 부스 한 대가 나올 뿐이었다. 협박 메모를 열 차례 넘게 남겼지만 거기서도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손에 쥔 단서는 단 하나, 쉰 번 넘게 녹음된 목소리뿐이었다. 양화대교의 밤 범인이 돈을 받을 자리를 정했다. 양화대교 남단 둔치. 돈을 가져다 두라고 했다. 경찰은 덫을 놨다. 진짜 돈 얼마에 위조지폐 뭉치를 섞어 두고, 다리 주변 어둠 속에 형사들을 잠복시켰다. 형호의 부모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아이를 돌려받기 위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 다리에 깔...

다섯 아이는 산을 떠난 적 없었다

1991년 3월 26일 아침, 대구 성서. 같은 동네에 살던 초등학생 다섯이 집을 나섰다. 아홉 살부터 열세 살까지, 손에는 빈 병이나 비닐봉지를 들었을 것이다. 도롱뇽 알을 주우러 와룡산에 간다고 했다. 와룡산은 차를 탈 일도 없는, 걸어서 닿는 동네 뒷산이었다. 저녁이 돼도 다섯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학교가 문을 닫은 날 다섯 아이가 산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그날의 사정이 있다. 1991년 3월 26일은 30년 만에 기초의회 선거가 부활한 날 이었다. 투표를 위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학교가 문을 닫았고, 갈 곳이 생긴 아이들은 산으로 향했다. 어른들이 투표소로 가던 아침, 아이들은 반대쪽 산길로 걸어 올라갔다. 1991년의 대구 성서는 지금처럼 아파트가 들어찬 동네가 아니었다. 와룡산은 아이들이 도롱뇽을 잡고 도토리를 줍던, 누구나 아는 앞산이었다.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들이 손전등을 들고 그 익숙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개구리소년'이라는 이름의 오해 사건은 오랫동안 '개구리소년 실종' 으로 불렸다. 그런데 다섯 아이가 주우러 간 것은 개구리가 아니었다. 한 아이가 남긴 말은 "아빠, 도롱뇽 알 찾아올게요" 였다. 정확히는 개구리알이 아니라 도롱뇽 알이었지만, 부르기 쉬운 쪽으로 이름이 굳었다. 이름이 사실보다 빨리 퍼지는 일은 흔하다. 수색의 규모는 단일 실종 사건으로는 비교할 데가 없었다. 군과 경찰, 예비군까지 동원돼 연인원 약 35만 명이 와룡산과 인근을 뒤졌고, 전단은 1000만 장 가까이 뿌려졌다 . 산은 헬기까지 떠서 훑었다. 그래도 다섯 아이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와룡산은 이미 다 뒤졌다고들 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니게임 ▶ Google Play에서 설치 🎬 영상으로 보기 다섯 아버지는 트럭에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