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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고 가라, 추기경이 말했다

1987년 6월 12일, 밤이 깊은 시각. 정부 당국자 한 사람이 서울 명동성당 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성당에는 경찰에 쫓겨 온 학생 수백 명이 사흘째 갇혀 있었다. 당국자가 전하러 온 말은 하나였다. 성당에 병력을 들여보내 학생들을 끌어내겠다는 통보였다. 통보를 받은 사람은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이었다. 그는 잠시 뒤 답을 내놓았다. 돌아가서 한 마디도 빼지 말고 그대로 옮기라고 했다. 그 대답이 이후 엿새를 갈랐다. 성당 밖의 1987년 학생 수백 명이 왜 성당으로 뛰어들었는지 이해하려면, 그해의 공기를 먼저 알아야 한다. 1987년의 한국에서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했다. 대통령은 선거인단이 뽑았고, 그해 4월 전두환 정부는 그 방식을 그대로 두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 조치 를 발표했다. 김수환을 비롯한 종교계와 지식인들은 곧바로 반대 성명을 냈다. 불씨는 그전에 이미 있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를 받다 숨졌다.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고 발표했지만, 실제 사인은 물고문이었다. 그 사실이 1월 중순 드러나면서, 정부 발표를 믿는 사람은 남지 않았다. 6월 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고,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다음 날인 6월 10일, 시민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경찰에 밀린 대열의 일부가 흘러든 곳이 명동성당이었다. 학생들은 성당을 목적지로 삼은 것이 아니라, 밀리다 그곳에 닿았다. 6월 11일 새벽부터 철야 농성이 시작됐다. 밟고 가라 성당의 주인은 김수환이었다. 그는 1969년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오른 사람이자, 두 달 전 호헌 조치를 정면으로 비판한 사람이었다. 정부로서는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상대였지만, 성당 안 농성이 길어지자 결국 병력 투입 카드를 꺼냈다. 6월 12일 밤의 은밀한 방문이 그 통보였다. 그 통보에 김수환이 돌려보낸 말은 지금 민주화운동 기록으로...

계약은 24곡이었다

1926년 8월 1일, 오사카의 한 녹음실. 조선에서 건너온 여자가 계약한 스물네 곡을 다 불렀다. 그런데 마이크 앞을 떠나기 전, 계약서에 없던 한 곡이 더 녹음됐다. 동생이 피아노 앞에 앉았고, 여자는 자기가 직접 가사를 붙인 왈츠를 불렀다. 제목은 '사의 찬미' — 죽음을 기린다는 뜻이었다. 사흘 뒤, 윤심덕은 부산으로 가는 배 위에서 사라졌다. 대개 이 이야기는 '현해탄에 몸을 던진 비운의 가수'로 뭉뚱그려진다. 그런데 남은 기록을 하나씩 따라가 보면, 뭉뚱그려진 자리마다 미뤄둔 사실과 갈라지는 설(說)이 숨어 있다. 성악은 돈이 되지 않았다 윤심덕은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도쿄에서 성악을 배운,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였다. 사람들은 '악단의 여왕' 이라 불렀다. 1923년 경성 무대에 데뷔했을 때, 서양 성악을 정식으로 배운 조선 여자가 독창회를 연 것 자체가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름값과 벌이가 따로 놀았다. 독창회를 열어도 손에 쥐는 건 교통비 수준이었다. 조선에는 아직 성악을 사서 듣는 관객도, 그것을 업으로 굴릴 시장도 없었다. 최정상 소프라노가 생활고에 시달렸다. 윤심덕이 오사카의 대중가요 녹음실에 앉은 건 그 때문이었다. 성악가가 아니라 유행가 가수로, 닛토레코드와 음반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해 여름 녹음한 곡이 스물네 곡 이었다. 계약 밖의 한 곡 스물네 곡으로 계약은 끝이었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한 곡이 더 녹음됐다. 루마니아 사람 이바노비치가 만든 왈츠 '다뉴브강의 잔물결' 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인 곡이었다. 피아노 반주는 동생 윤성덕이 맡았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제목은 '사의 찬미'. 계약에 없던 스물다섯 번째 곡이었다. 뒷날 이 노래는 윤심덕이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부른 유언처럼 기억된다. 다만 기록을 따지면, 이 곡은 계약한 스물네 곡을 다 채운 뒤 덤으로 녹음된 ...

아이를 쳐다보라고 12만 장을 뿌렸다

1923년 5월 1일 아침, 경성. 소년 200명이 시내를 네 구역으로 나눠 흩어졌다. 손마다 전단 뭉치가 들려 있었다. 찍어 낸 전단이 모두 12만 장 이었다. 전단의 제목은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아이들이 어른에게 전하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의 한 대목 이다. 아이를 쳐다봐 달라는 부탁 한 줄을 전하는 데 12만 장이 필요한 시절이었다. 부탁 한 줄에 왜 12만 장이 필요했는지는, 전단을 만든 사람의 사정부터 따라가야 보인다. 아이를 부르는 말이 없었다 1923년의 조선에서 아이는 집안의 맨 아래에 있었다. 어른이 아이를 부르는 말은 '어린애', '애녀석', '아해놈'이었다. 아이를 높여 부르는 말은 조선말에 없었다 . 전단 뒤에 있던 사람은 방정환이었다. 1899년 경성 야주개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하던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1907년 집안이 기울면서 가난한 아이로 자랐다 . 1917년에는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했다. 천도교의 한복판으로 들어간 결혼이었다. 천도교의 근본 교리는 한 문장이다 —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면 아이도 하늘이어야 했다. 하늘이라 믿는 아이를 '어린애'라 부를 수는 없었다. 방정환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아이를 부를 새 말이 필요했다. 늙은이, 젊은이, 어린이 1920년, 천도교 청년들이 잡지 '개벽'을 창간했다. 방정환은 개벽 3호에 번역시 한 편을 실었다. 제목은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 시 안에서 아이의 이름은 '어린이'였다. 늙은이, 젊은이와 나란히 서는 이름이었다. 말만으로 아이의 자리가 바뀌지는 않았다. 1922년 5월 1일, 방정환이 몸담은 천도교소년회가 어린이날을 선포했다. 첫해 행사는 한 단체의 이름으로 치러졌다. 이듬해 봄, 방정환은...

일본 경찰이 꽃 8만 그루를 태웠다

1933년 겨울, 강원도 홍천 보리울. 산골 학교 뒤편의 작은 묘목밭으로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밭의 묘목을 한 그루도 남기지 않고 뽑아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타 버린 묘목은 8만 그루. 전부 무궁화였다. 애국가 후렴에 박혀 있는, 지금 우리가 나라꽃이라 부르는 그 꽃이다. 묘목을 기른 사람은 일흔 살의 남궁억이었다. 무궁화를 길렀다는 사실이, 그 겨울에는 죄가 되었다. 붓을 내려놓은 자리 꽃을 심은 노인은 본래 산골 사람이 아니었다. 남궁억은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글을 쓰며 살던 사람이었다. 1898년, 남궁억은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이 되었다. 신문은 기울어 가던 나라에서 붓으로 싸우는 자리였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사라졌다. 신문도 글도 더는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1918년, 병을 얻은 남궁억이 강원도 홍천 보리울로 내려왔다. 서울의 붓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노인이 새로 손에 쥔 것은 묘목 한 그루였다. 학비 대신 자란 꽃 1919년 9월, 남궁억은 보리울에 모곡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 교실 뒤에는 묘목밭을 두었다. 밭에서 기른 것은 무궁화였다. 학비를 못 내는 학생과 학부모가 묘목을 길렀고, 묘목을 기른 삯이 학비를 대신했다. 다 자란 묘목은 전국의 학교와 교회로 실려 나갔다. 가난한 산골 학교 한 곳에서 시작한 일이 조선 곳곳으로 번졌다. 나라꽃을 전국에 심겠다는, 노인의 조용한 작정이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dy 친구와 체크인하며 집중하는 자기주도 공부 앱 ▶ Google Play에서 설치 꽃이 죄가 된 이유 일제는 무궁화를 가만두지 않았다. 무궁화가 그냥 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국가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에 박힌 꽃이자, 조선을 가리키는 표시였다. 그래서 일제는 꽃 자체를 더럽히는 말을 퍼뜨렸다.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나라꽃 무궁화의 내력 에는, 당시 무궁화에 붙은 별명이 이렇게 적혀 있다. 보기만 해도 ...

《상록수》를 쓴 심훈, 책 나오고 열아흐레 만에 죽었다

1936년 8월, 경성. 한 남자가 출판사 건물 안에서 먹고 잤다. 집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기가 쓴 소설을 책으로 묶는 마지막 작업을 직접 붙어서 보려고, 한성도서라는 출판사에 들어가 그 안에서 끼니를 때우고 잠을 잤다. 책이 나오기까지 그는 거기서 버텼다. 그리고 책이 나오자, 그는 곧 사라졌다. 책의 제목은 상록수 였다. 사철 잎이 지지 않는 나무라는 뜻이다. 남자의 이름은 심훈이었다. 오백 원이 걸린 소설 1935년 식민지 조선의 농촌은 가난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도시에서 공부한 청년들이 시골로 내려가 야학을 여는 일이 곳곳에서 있었다. 그해 동아일보가 창간 15주년을 맞아 농촌을 다룬 장편소설을 현상공모했다. 내건 상금이 500원 이었다. 보통 사람의 한 해 살림이 쉽게 넘보기 어려운 액수였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현상금이었다( 디지털당진문화대전 ). 여기에 당선된 사람이 심훈이었다. 본명은 심대섭. 1901년 서울 흑석동에서 태어나 영화도 찍고 시도 쓰던 사람이었다( 심훈, 위키백과 ). 그는 1934년, 충남 당진에 필경사 라는 작은 집을 손수 지어 내려가 있었다. 펜으로 밭을 간다는 뜻의 이름이었다. 심훈이 농촌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데에는 가까이서 본 두 사람이 있었다. 당진에서는 장조카 심재영이 야학을 열고 공동경작회를 꾸리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 안산 샘골에서는 최용신이라는 젊은 선생이 농촌 아이들을 가르치다 1935년 1월, 스물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훈은 이 두 사람의 자리를 소설 안에 옮겨 두고 싶어 했다. 오십사 일, 그리고 막힌 길 심훈은 필경사에서 상록수 를 써 내려갔다. 1935년 5월 4일부터 6월 26일까지, 54일 이었다( 디지털당진문화대전 ). 소설은 동아일보 현상공모에 당선됐고, 그해 9월부터 신문 지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연재가 끝나자 심훈은 이 이야기를 더 멀리 보내려 했다. 그가 고른 방법은 영화였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빚 갚으러 소 1,001마리를 몰고 갔다

1998년 6월 16일 아침, 판문점. 여든세 살 노인이 흰 트럭 50대를 세워 두고 그 앞에 섰다. 트럭마다 소가 실려 있었다. 모두 500마리였다. 분단 이후 민간 차량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부산일보 ). 세계에서 가장 무장된 국경을 향해, 노인은 소 떼를 몰고 갔다. 노인은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이었다. 외신은 그를 "자동차 거물(auto tycoon)이 소를 몰고 북으로 갔다"고 적었다( The Washington Post ). 자동차와 배와 아파트를 짓던 사람이, 하필 소를 앞세웠다. 정주영은 그 길을 빚 갚으러 가는 길이라고 불렀다. 소와 빚 사이에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놓여 있었다. 70원, 그리고 떠나온 고향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통천은 지금의 휴전선 북쪽에 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자체가 훗날 가 닿을 수 없는 땅이 된 셈이다. 열일곱 살의 정주영은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집을 나섰다. 70원은 큰돈이 아니라, 아버지가 소 한 마리를 팔아 손에 쥔 전부였다. 농사로 묶인 맏아들의 자리를 버리고, 소년은 그 돈을 들고 서울로 향했다. 농부의 아들은 그 뒤로 자동차를 만들고 배를 짓고 아파트를 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다만 떠나온 고향은 줄곧 휴전선 너머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소 한 마리. 그 한 마리가 이 이야기의 척추다. 정주영이 평생 마음에 진 빚은 사업의 빚이 아니라, 몰래 들고 나온 그 70원이었다. 빗장이 풀리고, 소가 먼저 넘었다 1998년 봄, 남북 사이의 빗장이 조금 풀렸다. 여든세 살이 되어서야 정주영은 고향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그가 택한 것은 자동차도 배도 아닌 소 떼였다. 아버지가 판 소 한 마리를, 500마리로 불려 돌려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제 그 한 마리 소가 천 마리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갑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