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쳐다보라고 12만 장을 뿌렸다

1923년 5월 1일 아침, 경성. 소년 200명이 시내를 네 구역으로 나눠 흩어졌다. 손마다 전단 뭉치가 들려 있었다. 찍어 낸 전단이 모두 12만 장이었다. 전단의 제목은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아이들이 어른에게 전하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의 한 대목이다. 아이를 쳐다봐 달라는 부탁 한 줄을 전하는 데 12만 장이 필요한 시절이었다. 부탁 한 줄에 왜 12만 장이 필요했는지는, 전단을 만든 사람의 사정부터 따라가야 보인다.

아이를 부르는 말이 없었다

1923년의 조선에서 아이는 집안의 맨 아래에 있었다. 어른이 아이를 부르는 말은 '어린애', '애녀석', '아해놈'이었다. 아이를 높여 부르는 말은 조선말에 없었다.

전단 뒤에 있던 사람은 방정환이었다. 1899년 경성 야주개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하던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1907년 집안이 기울면서 가난한 아이로 자랐다. 1917년에는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했다. 천도교의 한복판으로 들어간 결혼이었다. 천도교의 근본 교리는 한 문장이다 —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면 아이도 하늘이어야 했다. 하늘이라 믿는 아이를 '어린애'라 부를 수는 없었다. 방정환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아이를 부를 새 말이 필요했다.

늙은이, 젊은이, 어린이

1920년, 천도교 청년들이 잡지 '개벽'을 창간했다. 방정환은 개벽 3호에 번역시 한 편을 실었다. 제목은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 시 안에서 아이의 이름은 '어린이'였다. 늙은이, 젊은이와 나란히 서는 이름이었다.

말만으로 아이의 자리가 바뀌지는 않았다. 1922년 5월 1일, 방정환이 몸담은 천도교소년회가 어린이날을 선포했다. 첫해 행사는 한 단체의 이름으로 치러졌다. 이듬해 봄, 방정환은 판을 키웠다. 3월 20일 아이들이 읽을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도쿄 유학생들과 색동회를 꾸렸다. 4월 17일에는 천도교소년회·조선소년군·불교소년회까지 40여 개 단체가 조선소년운동협회로 모였다. 협회가 정한 첫 결의가 5월 1일 어린이날이었다. 잡지 창간에서 첫 어린이날까지 42일. 잡지가 나왔고, 40여 개 단체가 이름을 걸었고, 날짜가 박혔다.

그리고 5월 1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발표된 글은 셋이었다. 소년운동의 기초 조항,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어린 동무들에게 주는 글. 첫 번째 글의 첫 조항은 부탁이 아니었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허락을 구하는 문장이 아니라 요구하는 문장이었다. 총독부가 다스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해방'이라는 단어가 공개적으로 선포됐다. 국제연맹이 제네바 아동권리선언을 내놓은 게 1924년 — 경성의 선언이 한 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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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이 이야기에서 몇 가지는 기록을 짚어 둔다.

이름은 남았다

어린이날은 해마다 이어졌다. 5월 1일이 노동절과 겹쳐 문제가 되자 1927년부터 5월 첫째 일요일로 옮겼고,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멈췄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5일로 살아났다. 지금의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라는 말도 살아남았다. 다만 늙은이, 젊은이 곁에 아이의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일부러 밀어 올린 이름이라는 사실은, 말보다 먼저 잊혔다. 1923년 봄의 경성에서는 그 사실을 전하는 데 전단 12만 장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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