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찰이 꽃 8만 그루를 태웠다

1933년 겨울, 강원도 홍천 보리울. 산골 학교 뒤편의 작은 묘목밭으로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밭의 묘목을 한 그루도 남기지 않고 뽑아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타 버린 묘목은 8만 그루. 전부 무궁화였다. 애국가 후렴에 박혀 있는, 지금 우리가 나라꽃이라 부르는 그 꽃이다. 묘목을 기른 사람은 일흔 살의 남궁억이었다. 무궁화를 길렀다는 사실이, 그 겨울에는 죄가 되었다.

붓을 내려놓은 자리

꽃을 심은 노인은 본래 산골 사람이 아니었다. 남궁억은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글을 쓰며 살던 사람이었다.

1898년, 남궁억은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이 되었다. 신문은 기울어 가던 나라에서 붓으로 싸우는 자리였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사라졌다. 신문도 글도 더는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1918년, 병을 얻은 남궁억이 강원도 홍천 보리울로 내려왔다. 서울의 붓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노인이 새로 손에 쥔 것은 묘목 한 그루였다.

학비 대신 자란 꽃

1919년 9월, 남궁억은 보리울에 모곡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교실 뒤에는 묘목밭을 두었다. 밭에서 기른 것은 무궁화였다.

학비를 못 내는 학생과 학부모가 묘목을 길렀고, 묘목을 기른 삯이 학비를 대신했다. 다 자란 묘목은 전국의 학교와 교회로 실려 나갔다. 가난한 산골 학교 한 곳에서 시작한 일이 조선 곳곳으로 번졌다. 나라꽃을 전국에 심겠다는, 노인의 조용한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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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죄가 된 이유

일제는 무궁화를 가만두지 않았다. 무궁화가 그냥 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국가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에 박힌 꽃이자, 조선을 가리키는 표시였다.

그래서 일제는 꽃 자체를 더럽히는 말을 퍼뜨렸다.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나라꽃 무궁화의 내력에는, 당시 무궁화에 붙은 별명이 이렇게 적혀 있다.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선다. 손에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생긴다.

'눈에피꽃' '부스럼꽃'이라 불렀다. 꽃 한 송이를 흉하게 만들어서, 그 꽃이 가리키는 나라를 함께 지우려는 말이었다. 무궁화를 지키려 한 사람은 남궁억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동아일보는 1923년부터 십 년 동안 지면에 무궁화를 실으며 보존 운동을 폈다.

1933년 4월, 보리울 일대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당이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었다. 남궁억은 그 결사의 직접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무궁화와 함께 퍼뜨린 애국 사상이 결사의 뿌리가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해 12월 14일, 일본 경찰이 보리울로 들어왔다.

명목은 '불온사상을 고취하고 치안을 교란한다'였다. 경찰은 묘목밭의 무궁화 8만 그루를 모두 뽑아 불태웠다. 모곡학교 교직원과 교회 목사, 남궁억의 친척까지 함께 끌려갔다. 죄의 핵심은 단순했다. 무궁화 한 그루가, 일본의 눈에는 조선 한 조각이었다.

8만 그루는 탔고, 꽃은 남았다

남궁억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1935년에 병으로 풀려난 뒤, 1939년 세상을 떠났다. 옥살이 끝에 얻은 병이었다고 전해진다.

묘목 8만 그루는 1933년 겨울 보리울에서 모두 탔다. 그러나 십 년 넘게 전국으로 실려 나간 무궁화는,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학교와 교회 마당에 뿌리내린 뒤였다. 산골 묘포 한 곳을 태운 불로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꽃은 이미 가 있었다.

오늘 대한민국의 나라꽃은 무궁화다. 산골 학교 묘목밭에서 8만 그루가 타 버린 그 꽃과, 같은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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