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는 남고, 범인은 사라졌다

1991년 1월 29일 밤.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던 아홉 살 형호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11시, 형호의 집 전화가 울렸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서른 안팎의 남자 목소리였다.

전화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6일 동안 같은 목소리가 형호의 집으로 쉰 번 넘게 걸려왔다 (집계에 따라 예순 번을 넘겼다는 기록도 있다). 경찰은 통화를 전부 녹음했다. 그런데도 목소리의 주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한국 범죄사에서 화성 연쇄살인, 개구리 소년 실종과 함께 가장 오래 풀리지 않은 사건으로 남은 이름 — 이형호 유괴 살해 사건이다.

1991년, 쫓을 수 없던 시대

첫 전화에서 남자가 부른 것은 현금 7천만 원과 카폰이 달린 자동차였다. 1991년 서울에서 7천만 원은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에 가까웠고, 차에 다는 카폰은 부유함의 상징이던 시절이다. 형호의 부모는 시키는 대로 돈을 마련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잡을 방법이었다. 1991년 한국에는 금융실명제가 없었다. 누구나 가짜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 수 있었고, 통장을 쥐고 있어도 주인을 거슬러 올라갈 길이 없었다. 은행 안에 카메라도 거의 없었다. 범인이 돈을 찾으려 한 두 곳의 은행 지점에는 CCTV가 한 대도 없었다.

가짜 이름 통장이 가능했고, 은행에는 CCTV가 없었고, 범인이 현장에 남긴 물증은 없었다.

범인은 공중전화로만 전화를 걸었다. 발신지를 따라가도 길에 선 전화 부스 한 대가 나올 뿐이었다. 협박 메모를 열 차례 넘게 남겼지만 거기서도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손에 쥔 단서는 단 하나, 쉰 번 넘게 녹음된 목소리뿐이었다.

양화대교의 밤

범인이 돈을 받을 자리를 정했다. 양화대교 남단 둔치. 돈을 가져다 두라고 했다. 경찰은 덫을 놨다. 진짜 돈 얼마에 위조지폐 뭉치를 섞어 두고, 다리 주변 어둠 속에 형사들을 잠복시켰다.

형호의 부모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아이를 돌려받기 위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 다리에 깔린 잠복도, 진짜 돈에 섞은 위조지폐도 모두 경찰의 판단이었다. 부모는 정해진 자리에 돈뭉치를 놓았다.

형사들은 숨죽이고 기다렸다. 그런데 범인은 잠복한 형사들의 코앞에서 돈을 들고 사라졌다.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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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이 가리킨 첫날

1991년 3월 13일 낮, 형호가 발견됐다. 잠실대교에서 서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한강변 배수로였다. 두 손은 끈으로 묶여 있었고, 사인은 질식사로 밝혀졌다. 사라진 지 43일 만이었다.

여기서 부검이 한 가지를 밝혔다. 형호의 위에 남아 있던 음식은, 유괴 당일 친구 집에서 먹은 점심이었다. 곧 형호는 사라진 첫날에 이미 숨졌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사건을 떠올릴 때, 몸값을 제때 건네지 못해 아이를 잃었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 짐작과 어긋난다. 16일 동안 걸려온 쉰 번의 전화도, 양화대교에 둔 돈도, 부모가 시키는 대로 지킨 모든 밤도 — 처음부터 떠난 아이를 두고 오간 협상이었다.

수사망에 한 사람이 올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전화 목소리와 일치한다는 성문 분석을 내놨다. 그러나 목소리를 사람에 묶을 결정적 물증이 없었다. 용의자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경찰이 끝까지 쥔 것은 녹음된 목소리뿐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지문도 없었다.

목소리만 극장에 남았다

2006년 1월, 공소시효 15년이 다 찼다. 그 순간부터 범인은, 설령 누구인지 밝혀지더라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듬해 2007년, 박진표 감독이 영화 〈그놈 목소리〉를 내놨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서는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녹음된 범인의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온다. 행여 누군가 알아들을까 하는, 수사가 끝난 뒤의 마지막 시도였다.

잡아도 처벌할 수 없게 된 뒤에야, 범인의 목소리는 전국 극장에서 재생됐다. 공소시효는 끝났고, 목소리는 박제됐고, 주인은 끝내 익명으로 남았다. 형호의 부모가 16일 밤을 매달렸던 그 목소리는, 지금도 누구의 것인지 모른 채 필름 위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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