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찰이 소화제 약방 주인을 끌고 갔다

1919년 10월 31일 새벽, 서울 순화동. 일본 경찰이 약방 하나를 덮쳤다. 끌려간 사람은 서른여섯의 민강. 체하고 얹힌 사람들에게 물약 한 병을 팔던 가게의 주인이었다.

가게 이름은 동화약방, 물약 이름은 활명수. 목숨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이었다. 소화제를 파는 가게였는데, 경찰은 약을 찾고 있지 않았다.

궁 안에 있던 약, 궁 밖에서 앓던 사람들

활명수를 만든 사람은 민강의 아버지 민병호였다. 민병호는 궁중 선전관이었다. 임금 가까이에서 명령을 전하던 무관 자리이자, 궁중의 처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1890년대 조선에서 급체와 토사곽란은 흔한 병이었다. 배를 움켜쥐고 앓아도 집에서 달여 먹는 탕약 말고는 마땅한 약이 없었다. 약은 궁 안에 있었고, 사람들은 궁 밖에서 앓았다.

민병호는 궁중 비방에 서양 의학 지식을 붙여, 달이지 않고 병째로 마시는 물약을 만들었다. 1897년 9월 25일, 순화동 5번지 자기 집에 동화약방을 열었다. 활명수를 한국 최초의 신약이라 부르는 관행이 여기서 나왔다. 다만 이 표현은 회사와 언론이 함께 써 온 말이고, '신약'의 기준 자체가 느슨하다는 점은 감안해 두는 편이 정확하다.

값은 쌌던 적이 없다. 1910년대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 설렁탕 두 그릇 값이었다. 그런데도 팔렸고, 팔린 만큼 베껴졌다. 이름만 조금씩 바꾼 유사품이 60여 종 깔렸다. 동화약방은 1910년 8월 15일 부채표를 특허국에 등록했다. 이름을 지키려고 붙인 표시였다.

약방이 돈이 지나가는 길목이 됐다

1919년 3월 만세시위가 지나가고,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섰다. 서울에서도 4월 23일 정오 종로에서 국민대회가 열렸다. 민강은 준비자금의 출납을 맡았다. 천도교 대표 안상덕과 기독교 대표 현석칠이 각각 600원씩 대기로 했고, 자금은 동화약방을 거쳐 가기로 정해졌다. 4월 20일, 민강은 안상덕이 가져온 500원을 김유인에게 넘겼다. 약방을 거쳐 간 500원으로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선포문」이 인쇄됐다.

1919년 10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윤종석이 약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 강매가 동화약방을 추천했다. 임시정부가 서울에 놓을 연통부 자리를 찾는 길이었다. 연통부는 국내 정보와 군자금을 상해로 올려보내는 연락 조직이다.

약방에는 영업용 화물 취급점이 딸려 있었다. 공성운송점이었다. 약 상자가 매일 드나드는 자리였고, 상해에서 온 문서가 약 짐에 섞여 들어와도 이상할 게 없는 자리였다. 민강은 두 가지를 약속했다. 상해에서 온 사람이 암호를 대면 윤종석과 만나게 해주는 것, 그리고 공성운송점으로 들어오는 상해발 문서를 받아 전하는 것. 순화동 5번지는 임시정부의 서울 연통부가 됐다. 발각되면 약방과 활명수와 민강이 한꺼번에 끝나는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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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 천장절은 왜 10월 31일이었나

민강 쪽이 다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잡은 날은 천장절,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여기서 한 번 걸린다. 당시 일왕이던 다이쇼 천황의 생일은 8월 31일이다. 10월 31일이 아니다. 무더위를 피해 1913년부터 축하 행사를 10월 31일에 치렀기 때문이다. 축일이 두 달 밀려 있었고, 1919년 10월 31일은 옮겨 잡은 축일이었다. 민강 쪽은 옮겨 잡은 축일에 맞춰 격문을 뿌리려 했다.

격문은 순화동에 닿지 못했다. 계획이 사전에 발각됐고, 민강은 10월 31일 새벽에 붙잡혔다. 일본 경찰이 노린 것은 약이 아니었다. 순화동 5번지라는 주소와, 약 상자가 드나들던 짐칸이었다.

주소를 한 번 더 짚자면, 1919년 당시 동화약방이 선 자리의 행정지명은 순화동이 아니라 화천정 5번지였다. 순화동은 뒤에 붙은 이름이다. 같은 자리, 다른 이름이다.

기록에 없는 것

민강이 왜 가업과 목숨을 걸었는지, 남은 기록은 말해주지 않는다. 공식 기록에 남은 것은 행위뿐이다. 맡았다, 전달했다, 승낙했다. 심경을 적은 편지도, 회고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민강의 속마음을 대신 지어내지는 않겠다.

기록이 말해주는 것은 그다음이다. 민강은 1920년 12월 7일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1921년 3월 23일 징역 1년으로 감형됐다. 1922년 1월 28일 건강이 나빠져 가출옥했고, 감옥 문을 나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1931년 11월 4일,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주인을 잃은 동화약방은 경영난에 빠졌고, 1937년 독립운동을 함께한 윤창식이 인수했다. 회사 이름도, 물약 이름도 바뀌지 않았다.

순화동의 갈색 병

활명수는 129년째 같은 이름으로 팔린다. 2026년 3월 기준 누적 판매는 약 90억 병, 국내 액상 소화제 시장의 약 70%를 차지한다. 병에 붙은 부채표는 1910년 8월 15일 특허국에 등록된 상표 그대로다. 유사품 사이에서 이름을 지키려고 붙인 표시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등록 상표로 남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민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민강의 묘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속이 얹히면 사람들은 약국에서 갈색 병 하나를 집는다. 활명수가 실려 나가던 순화동의 화물 취급점이, 한동안 상해의 문서를 받는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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