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지른 열차에선 아무도 안 죽었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 중앙로역. 한 남자가 열차 바닥에 휘발유를 붓고 라이터를 켰다. 불은 순식간에 한 칸을 삼켰다. 그리고 그 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살아서 걸어 나왔다.

그날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다쳤다. 그런데 불이 처음 붙은 1079호 열차에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죽은 사람들은 불이 난 곳에 있지 않았다. 반대편 선로로 들어와 멈춘 다른 열차 안에 있었다. 라이터를 켠 남자가 사람들을 태워 죽였다는 건, 실제로 일어난 일의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불을 낸 사람, 그리고 값이 깎인 열차

불을 낸 사람은 56세 김대한이었다. 2001년 뇌졸중으로 몸 한쪽이 마비됐고, 그 뒤로 우울증을 앓았다. 혼자 죽기는 싫다고 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생을 끝내려고, 우유갑에 휘발유를 담아 지하철에 올랐다. 그의 사정은 그날 벌어진 일의 시작일 뿐, 규모의 원인은 아니었다.

대구 지하철 1호선은 1997년 개통해 그때 여섯 해째였다. 문제는 열차가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느냐였다. 의자는 폴리우레탄 폼, 바닥과 통로는 폴리염화비닐(PVC)이었다. 값이 싼 재료였고, 불이 붙으면 빠르게 타면서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뿜었다. 대구의 전동차 한 량 값은 5억 원 안팎으로, 같은 시기 수출용으로 만들던 전동차 한 량 값의 3분의 1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액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방향은 하나로 모인다. 아침마다 사람을 실어 나르던 열차는, 값을 아끼려고 고른 재료로 만들어져 있었다.

반대편에 들어온 1080호

불이 난 지 3분쯤 뒤, 반대편 승강장으로 1080호 열차가 들어와 멈췄다. 중앙로역은 이미 검은 연기로 차오르고 있었다. 종합사령실은 폐쇄회로 화면으로 그 연기를 보고 있었다. 1080호로 무전이 갔다. 화재가 났으니 조심해서 진입하라는 내용이었다. 멈추라는 말도, 그냥 지나치라는 말도 없었다. 판단은 현장에 남겨졌다.

1080호 기관사는 연기를 보고 열려 있던 문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승객들에게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방송했다. '곧 출발하겠다'는 안내가 세 차례 반복됐다. 늘 하던 안내였다.

곧 출발합니다. — 1080호 안내방송, 세 차례

승객들은 앉은 자리에서 기다렸다. 늘 그래 왔듯이. 문은 닫혀 있었고, 열차는 곧 다시 떠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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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지 않은 이유

9시 57분경, 중앙로역에 전기가 끊겼다. 열차를 움직이던 힘도, 문을 여닫던 힘도 함께 사라졌다. 대구 지하철의 문은 압축 공기로 여닫히는 방식이었고, 전기가 나가자 문을 다룰 힘이 남지 않았다. 열차에 실린 배터리가 잠깐은 버텨 줬다. 10시 10분, 사령실에서 마지막 지시가 내려왔다. 전원을 끄고 빠져나오라는 것이었다. 1080호 기관사가 마스터키를 뽑아 들고 열차를 떠나자, 배터리로 버티던 문마저 완전히 멈췄다.

불을 지른 1079호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숨진 192명 가운데 142명이 문이 잠긴 1080호 한 대에서 나왔다. 나머지는 연기로 가득 찬 승강장과 통로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 라이터가 사람을 죽인 게 아니었다. 열차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문이 언제 닫혔는지가 죽였다.

물로 씻어낸 자리

참사가 끝난 뒤에도 일은 남아 있었다. 대구도시철도공사가 불에 탄 전동차를 곧바로 차량기지로 옮겨 물청소를 하면서, 화재 흔적이 심하게 훼손됐다. 무엇이 어떻게 탔는지 가려낼 증거의 일부가 물과 함께 씻겨 나갔다. 유가족이 오래 싸워야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참사 뒤 전국 지하철의 내장재가 바뀌었다. 잘 타던 의자는 금속과 불연 소재로 교체됐고, 대구는 2005년 봄 모든 열차를 불에 타지 않는 재료로 다시 지었다. 방화범 김대한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듬해 진주교도소에서 지병으로 숨졌다. 오늘 한국의 지하철 의자는, 불이 닿아도 2003년처럼 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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