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쏜 남자는 남산으로 가지 않았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 담장 안 안가의 만찬 자리에 네 남자가 한 상에 둘러앉았다. 대통령 박정희, 경호실장 차지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 그리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저녁 6시경 시작된 만찬은 7시 40분경 총성으로 끝났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침입자도 경비병도 아니었다. 대통령과 마주 앉아 있던 김재규였다.
총격은 성공했다. 1961년 5·16부터 18년을 집권한 대통령이 만찬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을 통째로 쥔 김재규는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붙잡혔다. 가장 많은 비밀과 가장 많은 부하를 가진 남자가 왜 하룻밤 만에 무너졌나. 답은 방아쇠가 아니라, 총을 쏜 다음에 있다.
두 달 전부터 유신은 금이 가고 있었다
총성이 울리기 두 달 남짓 전부터 유신 체제는 흔들리고 있었다. 1979년 8월, 서울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강제 진압으로 끌려 나왔다. 10월 4일에는 여당이 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빼앗았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고, 시위는 학생을 넘어 시민들 사이로 번져 마산으로 옮겨붙었다. 10월 18일 0시, 정부는 부산에 계엄을 선포했다. 계엄 선포 뒤 연행된 사람만 1,058명이었다.
부산과 마산의 거리를 두고 청와대 안에서 두 남자가 갈라졌다. 차지철은 강경 진압을 밀었고, 김재규는 반대편에 섰다. 김재규는 부산에 직접 내려가 시위를 눈으로 확인했고, 뒷날 법정에서 부산의 시위는 학생들의 데모가 아니라 민란에 가까웠다고 진술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데모대원 100만, 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차지철이 했다는 말이다. 다만 짚어 둘 것이 하나 있다. 위 발언은 김재규가 재판정에서 옮기면서 세상에 알려진 말이다. 차지철 본인은 궁정동에서 목숨을 잃었고, 발언을 따로 확인해 줄 기록은 없다. 남은 통로가 총을 쏜 사람의 법정 진술뿐이라는 사실까지가 기록이다.
만찬 통보는 두 시간 전에 왔다
10월 26일 오후 4시 10분, 남산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에게 차지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저녁 6시에 대통령을 모시고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이 있다는 통보였다. 만찬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이 되지 않았다.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김재규의 구역이었다. 김재규는 곧장 궁정동으로 넘어가 안가 2층의 부장 집무실로 올라갔다. 저녁 6시에 만찬이 시작됐고, 한 시간이 못 된 6시 50분경 김재규가 조용히 방을 나와 부하 박선호와 박흥주를 불렀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맡으라는 지시였다. 재판 기록에는 지시와 함께 남긴 한마디가 남아 있다. "오늘 해치운다." 김재규는 2층 집무실의 권총을 챙겨 만찬장으로 돌아가 다시 자리에 앉았고, 7시 30분경 박선호를 다시 불러 준비가 끝났는지 확인했다. 지시부터 총성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통보에서 결행까지 세 시간 남짓이었다. 세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표는 뒷날 재판의 쟁점으로 이어진다. 우발이었나, 계획이었나.
김재규가 탄 차는 남산으로 가지 않았다
저녁 7시 40분경, 김재규가 권총을 꺼냈다. 첫 발은 차지철에게, 다음 발은 박정희에게 향했다. 권총이 도중에 말을 듣지 않자 김재규는 방을 나가 박선호의 리볼버로 바꿔 들고 돌아와 총격을 끝냈다. 만찬장 밖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부하들이 대통령 경호원들을 쐈다. 밤이 끝나기 전,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포함해 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총격까지는 김재규의 각본대로 흘러갔다. 문제는 총을 쏜 다음이었다. 안가 본관에는 김재규가 만찬 전에 미리 불러 둔 손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같은 차에 올랐다. 차가 갈 수 있는 곳은 둘이었다. 부하와 정보망이 그대로 살아 있는 남산의 중앙정보부, 아니면 군 지휘부가 모여드는 육군본부. 김재규는 정승화의 권유에 따라 육군본부로 방향을 잡았다.
육군본부는 김재규의 부하가 한 명도 없는 군인들의 땅이었다. 김재규는 자기가 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밤을 보냈다. 밤사이 만찬장에 함께 있다 살아남은 김계원이 군 수뇌부에 범인을 알렸고, 10월 27일 새벽 김재규는 육군본부에서 체포됐다. 체포를 지시한 사람은 김재규가 궁정동으로 불러들였던 정승화였다.
18년 정권을 무너뜨린 총격은 몇 분이면 충분했다. 총을 쏜 사람은 행선지조차 동승자의 권유로 정했다. 정보기관의 요새 대신 군인들의 땅을 고른 순간, 판은 군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우발이었나, 계획이었나
체포 두 달이 되지 않은 1979년 12월 18일, 김재규가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 섰다. 김재규는 궁정동의 총격이 우발이 아니라 계획된 혁명 거사였다고 주장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법원은 혁명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죄명은 내란목적살인 등이었고, 1980년 5월 24일 김재규는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동기를 둘러싼 해석은 지금도 갈린다. 만찬 통보가 겨우 두 시간 전에 왔다는 사실은 즉흥 쪽을 가리키고, 총격의 밤에 육군참모총장을 미리 안가로 불러 둔 행적은 준비 쪽을 가리킨다. 김재규가 왜 쐈는지를 묻는 논쟁은 재판이 끝나고 4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한 가지는 어느 쪽이든 같다. "오늘 해치운다"도, 차지철의 캄보디아 발언도, 결행의 안쪽을 보여 주는 말들은 대부분 김재규 쪽 재판 기록을 통해 남았다.
분명하게 남은 것도 있다. 궁정동의 총성으로 유신은 끝났고, 김재규는 총을 쏜 뒤의 첫 갈림길에서 자기 요새를 버렸다.
총성이 울린 만찬장 건물은 뒷날 헐렸다. 궁정동 안가 터에는 무궁화동산이라는 작은 공원이 들어섰다. 18년 정권을 끝낸 총성도, 하룻밤 만에 끝난 김재규의 시간도, 지금은 공원 이름 하나로 남아 있다. 10·26의 승부가 갈린 곳은 방아쇠가 아니라, 총을 쏜 뒤 차가 향한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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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10·26 사건 — 위키백과
- 10·26사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 (31) 김재규의 10·26 사건 — 경향신문
- 부마민주항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부마 민주 항쟁 — 위키백과
-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쐈나 — 한국일보
- 10·26 때 김재규 옆에 앉은 김계원 — 경향신문 (좌석 배치)
- 김재규 — 위키백과 (재판·사형·최후진술)
- 정승화 — 위키백과 (체포 지시·육본행)
- 운명의 갈림길, 중정이냐 육본이냐 — 오마이뉴스
- "100~200만 죽인다고 까딱 있겠나", 막가는 청와대 — 프레시안 (캄보디아 발언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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