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장이 자기 수용소에 갇혔다

1952년 5월 7일 오후, 거제도 제76수용소 정문. 미군 준장 프랜시스 도드가 장교 한 명과 함께 철조망 앞에 섰다. 포로 대표가 면담을 요청했고, 도드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작업조가 드나들도록 정문이 열린 순간, 안쪽의 포로들이 도드를 붙잡아 철조망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함께 있던 장교는 문기둥을 붙잡고 빠져나왔다. 도드는 사라졌다.

그가 책임지던 포로는 17만 명이 넘었다. 수용소를 지휘하던 사람이, 자기가 지휘하던 철조망 안에 갇혔다.

17만 명이 한 섬에 모인 이유

거제도에 이만한 규모의 수용소가 생긴 건 전쟁의 형편 때문이었다. 1950년 가을 인천상륙작전 뒤 전선이 북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사로잡힌 인민군과 중국군 포로가 급격히 불어났다. 육지의 수용소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고, 본토에서 떨어진 섬이 통제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더해졌다. 1951년, 거제도 고현·수월 일대에 거대한 수용소 단지가 들어섰다.

문제는 그 안이 또 하나의 전선이었다는 데 있다. 17만 명은 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가 막사별로 갈렸고, 철조망 안에서 자기들끼리 조직을 만들어 충돌했다. 인민재판, 폭행, 살해가 수용소 안에서 벌어졌다. 미군 경비병은 17만 명이 만든 내부 권력 구조를 사실상 통제하지 못했다.

판문점이 막힌 자리, 포로 한 사람의 의사

같은 시기, 판문점에서는 1951년부터 휴전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전선의 총성은 잦아들었지만 회담은 한 지점에서 멈춰 있었다 — 포로를 본인 뜻과 상관없이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인가.

유엔군 측은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포로를 강제로 송환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공산 측은 전원 송환을 요구했다. 이 한 가지가 풀리지 않아 한국전쟁의 휴전은 이후로도 1년 넘게 미뤄졌다. 자발적 송환이냐 강제 송환이냐 — 거제도 철조망 안의 분열은 바로 이 쟁점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누가 남고 누가 돌아갈지를 한 명씩 가려내는 심사 작업은 이미 유혈 사태로 번진 뒤였다.

도드를 정문으로 불러낸 포로 대표는 이학구였다. 그는 1950년에 미군에 사로잡힌 인민군 고위 장교로, 수용소 안 친공 포로 조직을 이끌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투항이었는지 생포였는지는 기록에 따라 결이 갈리지만, 거제도 안에서 그가 가졌던 위치만큼은 여러 자료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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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을 꺼낸 값 — 종이 한 장

도드가 끌려 들어간 뒤, 미 8군은 찰스 콜슨 준장을 새 수용소장으로 급파했다. 무력 진입이 거론됐지만, 그렇게 하면 인질이 된 도드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콜슨은 철조망 안으로 전화선을 끌어와 도드와 직접 통화하며 협상에 들어갔다.

포로들의 요구는 돈도 무기도 아니었다. 유엔군이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죽이고 다치게 한 일이 있었음을 문서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콜슨은 서명했다.

유엔군에 의해 많은 포로가 죽거나 다친 일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1952년 5월 10일 밤 9시 반, 도드가 78시간 만에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그를 꺼낸 것은 구출 작전이 아니라 콜슨이 서명한 답신 한 장이었다.

여기서 고증이 갈린다. 미국 측은 그 서명이 인질의 목숨이 걸린 강압 아래 나온 것이라 효력이 없다고 곧바로 주장했다. 반대로 공산 측은 "유엔군이 스스로 포로를 죽였다고 적은 종이"를 손에 넣은 셈이었다. 같은 문서가 한쪽에는 무효의 종이, 다른 쪽에는 선전의 자료가 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한 자료들은 이 각서가 곧 공산 측 선전에 활용됐다고 적는다.

별 하나가 25년을 돌아 제자리로

대가는 빨랐다. 1952년 5월 23일, 도드와 콜슨은 나란히 준장에서 대령으로 강등됐다. 6월, 새로 부임한 헤이든 보트너 준장이 제76수용소를 무력으로 다시 장악했다.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가 나왔다.

도드는 군에 남았지만 강등된 계급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미 육군이 그의 준장 계급을 다시 인정한 건 1977년, 도드가 세상을 떠나고 4년이 지난 뒤였다. 한 사람이 잃은 별 하나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25년이 걸렸고, 정작 본인은 그 자리를 보지 못했다.

17만 명을 가둔 철조망 안에서, 미군 장군 한 명이 78시간 동안 포로였다. 그를 풀어준 것도, 그의 계급을 떨어뜨린 것도 총이 아니라 종이 한 장의 서명이었다. 거제도의 그 사흘은 전쟁이 어디서 멈췄는지를, 정문 안쪽에서 한 번 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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