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 김일이 이노키를 껴안았다

1975년 3월 27일 저녁, 서울 장충체육관. 8천 명이 들어찼다. 링 위에서 김일의 왼쪽 귀가 베였다. 안토니오 이노키의 주먹은 김일의 왼쪽 귀로만 몰렸고,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로 김일은 머리를 내리꽂기 시작했다. 걸려 있는 것은 김일의 인터내셔널 헤비급 벨트였다.

13분 38초 뒤, 심판은 스물을 셌다. 벨트는 김일에게 남았다. 이긴 사람은 없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은 국민적인 인기를 누린 종목이었다. 국가기록원이 두 시대를 정리한 기록에는 김일의 박치기와 역도산 문하라는 이력이 인기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다만 링 위의 김일에게는 이름이 셋 있었고, 셋 가운데 한국 이름은 일본 링에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고흥의 김태식이 어선에 올랐다

첫 번째 이름은 김태식이다. 1929년 2월 24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에서 태어난 본명이다.

1955년 일본의 거리에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집집마다 수상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 역 앞과 광장에 세워둔 텔레비전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닛폰테레비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가 설치를 밀어붙인 가두 텔레비전이었다. 관중이 특히 쇄도한 방송은 프로레슬링, 복싱, 스모, 프로야구 중계였다. 화면 속에서 미국 선수들을 넘어뜨리는 사람의 이름은 역도산이었다. 전쟁에 진 나라에서 역도산은 이기는 사람이었다.

고흥의 김태식이 역도산을 동경했다. 일본 쪽 기록은 김태식이 1958년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입국했다고 적는다. 여권도 배편도 없었다. 어선이었다.

역도산이 제자에게 한국 이름을 금했다

이듬해 김태식은 출입국 관리법 위반으로 붙잡혀 갇혔다. 갇힌 자리에서 김태식이 한 일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한국 쪽 기록과 일본 쪽 기록이 함께 전하는 대목이다. 역도산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고 썼다.

역도산이 신원 인수인으로 나섰다. 일본프로레슬링 커미셔너를 맡고 있던 정치인 오노 반보쿠까지 움직였고, 김태식은 풀려나 일본프로레슬링에 들어갔다. 밀입국자를 링으로 데려오는 데 현직 대의사의 손이 닿았다는 뜻이다.

1959년 11월, 김태식은 두 번째 이름으로 데뷔했다. 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郎). 역도산이 지어 준 링네임이었고, 첫 상대는 조 히구치였다. 무기는 머리였다. 일본에서 김일의 박치기는 원폭 박치기라고 불렸다.

그리고 역도산은 제자에게 한국 이름을 쓰는 것을 엄금했다.

금지의 무게는 역도산 자신의 이름에서 나온다. 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이다.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스모를 그만둔 뒤로 역도산은 자신이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위에 감추고 살았다. 조선 출신을 감추고 사는 스승이, 조선에서 밀항해 온 제자에게 건 금지였다.

덧붙이자면 역도산의 생년월일과 향년은 자료마다 다르게 적힌다. 일본어 위키백과조차 여러 설이 있다고 표기한다. 이름을 지우고 산 사람의 기록은 지운 만큼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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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키가 김일을 이긴 것은 평생 한 번이었다

1960년 4월, 역도산은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일곱 살 소년 하나를 직접 뽑아 일본으로 데려왔다. 1960년 9월 30일 도쿄 다이토구의 체육관에서 소년이 프로 첫 경기를 치렀다. 링 반대편에 선 사람이 김일이었고, 소년은 7분 6초 만에 졌다. 소년은 링네임 없이 본명 그대로 링에 올랐다. 훗날 안토니오 이노키로 불리게 되는 사람이다.

1963년 12월 8일 밤, 도쿄 아카사카의 호텔 뉴 재팬 지하에 있던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에서 역도산이 칼에 찔렸다. 일주일 뒤 역도산이 죽었다. 마음을 기대던 사람을 잃은 김일은 일본에 있을 자리가 없어져 한국으로 일단 돌아갔고, 1964년 9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일본 링으로 돌아왔다.

김일과 이노키는 이후 오래 링에서 마주 섰다. 두 사람이 숱한 명승부를 남겼다는 말은 사실이다. 다만 승부의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데뷔전에서 김일에게 진 뒤로 이노키가 김일을 이긴 것은 단 한 번이다. 1974년 10월 10일 도쿄 구라마에 국기관, 이노키가 NWF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서 치른 여섯 번째 방어전이었다. 상대로 부른 사람이 일본프로레슬링 시절의 선배 김일이었고, 13분 13초 만에 백드롭이 김일을 눕혔다.

2022년 안토니오 이노키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 신문의 부고에도 같은 문장이 실렸다. 데뷔전 상대가 김일이었고, 이노키는 졌다.

13분 38초, 승자는 없었다

1974년 10월 도쿄에서 김일은 이노키의 벨트를 얻지 못했다. 다섯 달 뒤, 반대로 이노키가 김일의 벨트를 향해 서울로 왔다.

경기를 전한 일본 스포츠지 기록은 이렇게 남아 있다. 이노키가 펀치로 김일의 왼쪽 귀를 집중 공격했고, 피투성이가 된 김일이 불을 뿜듯 원폭 박치기를 꽂았다. 이노키는 두 발, 세 발을 견뎠고 네 발째에 쓰러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리 4자 굳히기를 건 채로, 걸린 그대로 링 밖으로 함께 떨어졌다. 관중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판이 스물을 셌다.

양자 링아웃. 벨트는 방어됐고, 승자는 기록되지 않았다.

1975년 장충체육관 경기는 "김일이 이노키를 이겼다"로 기억되는 일이 많다. 기록이 말하는 것은 13분 38초 20카운트 양자 링아웃 무승부다. 김일은 이기지 않았고, 벨트만 지켰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인터내셔널 헤비급 왕좌에 도전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경기가 끝난 링 위에서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는 서로의 분투를 기리며 껴안았다. 조명이 두 사람을 비췄다. 15년 전 도쿄에서 이노키의 첫 상대였던 사람이 김일이었다.

휠체어에서 일어난 사람

이노키가 도전한 벨트를 김일이 얻은 과정도 한 번에 끝난 일이 아니다. 1972년 12월 1일, 보보 브라질과의 이른바 박치기 세계 제일 결정전이 인터내셔널 헤비급 왕좌 결정전이 되었다. 첫 경기에서 김일은 졌다. 사흘 뒤 12월 4일 재대결에서 이겨 제9대 왕자가 되었다.

이노키의 도전은 1981년 3월까지 이어진 스물아홉 번의 방어전 가운데 하나였다. 왕좌는 이듬달 NWA 본부의 권고를 받아 반납됐다. 링 위에서 빼앗긴 벨트가 아니었다.

박치기는 김일의 몸에도 쌓였다. 1982년 목의 지병이 악화되면서 김일은 사실상 링을 떠났고, 1987년부터는 경기 후유증으로 여러 병을 앓았다.

1995년 4월 2일, 도쿄돔에서 김일의 은퇴식이 열렸다. 김일은 휠체어에 앉은 채 링으로 이어진 통로를 들어왔다. 널리 알려진 장면은 여기까지다. 그런데 링에 오를 차례가 되자 김일은 휠체어에서 일어섰고, 루 테즈와 함께 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링포스트를 몇 차례 두드린 뒤 김일은 링을 떠났다. 2006년 10월 26일, 김일은 서울 노원구의 병원에서 일흔일곱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 링에서 김일에게 한국 이름은 허락되지 않았다. 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데뷔했고, 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원폭 박치기를 꽂았고, 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왕좌를 스물아홉 번 지켰다. 1975년 3월 27일 장충체육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안토니오 이노키를 껴안은 사람은 오키 긴타로가 아니라 김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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