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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된 선장은 통신실에 있었다

1993년 10월 10일 오전 11시 40분, 전북 부안 위도 파장금항. 유진호 선장 최문수가 항구로 들어오다 10톤짜리 흰 배 고물에 서 있는 남자를 봤다. 감색 점퍼를 입고 빨간 캡을 손에 들고 있었다. 최문수는 남자를 백운두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반 전 위도 앞바다에서 뒤집힌 여객선 서해훼리호의 선장이었다. 최문수가 본 사람은 백운두가 아니었다. 부안경찰서 위도지서장 장복영 경위 였다. 착각 하나가 이미 죽어 있던 사람을 전국 수배자로 만드는 데는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 한 번 뜨는 배에 일요일마다 사람이 몰렸다 위도는 1980년대 후반부터 낚시터로 이름이 났다. 전국에서 낚시꾼이 몰려들면서 이용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 그런데 위도 파장금항과 부안 격포항을 잇는 배는 하루 왕복 한 번이었다. 증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배는 서해훼리호 하나였고, 일요일 아침이면 섬을 나가려는 주민과 뭍으로 돌아가려는 낚시꾼이 같은 배 앞에 섰다. 서해훼리호는 1990년 10월에 지은 110톤짜리 여객선이었다. 길이 33.9m, 폭 6.2m. 정원은 승무원 14명을 포함해 221명 이었다. 1993년 10월 10일 아침 파장금항에서 배에 오른 사람은 362명이었다. 정원보다 141명이 많았고, 화물 16톤이 함께 실렸다. 9시 40분, 백운두가 출항을 골랐다 일요일 아침 위도 앞바다에는 북서풍이 초당 10~14m로 불었고, 파도는 2~3m로 일었다. 여객선이 나가서는 안 되는 바다였다. 다만 폭풍주의보는 내려지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고, 일부 승객은 출항을 요구했다. 결정은 쉰여섯 살 선장 백운두의 몫이었다. 9시 40분, 서해훼리호가 파장금항을 떠났다. 30분 뒤인 10시 10분, 임수도 부근에서 배가 돌풍을 만났다. 백운두는 뱃머리를 돌렸다. 위도로 되돌아가려는 회항이었다. 뱃머리를 돌리던 도중 파도가 배를 때렸고, 서해훼리호는 그대로 뒤집혔다. 362명 가운데 70명이 구조됐다. 구조된 70명 안에 백운두는 없었다...

1만 7천 년 그림이 15년 만에 병들었다

1940년 9월 12일, 프랑스 남서부 몽티냑. 열일곱 살 마르셀 라비다가 친구 셋을 데리고 언덕의 좁은 구멍 앞에 섰다. 손에는 급히 만든 기름 등불과 큰 칼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네 소년은 금을 찾으러 온 참이었다. 구멍을 넓히고 라비다가 먼저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발밑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등불을 비추자 보물은 없었다. 대신 벽마다 짐승이 가득했다. 검은 소, 붉은 말, 뿔 달린 사슴. 소년들이 찾아낸 것은 약 1만 7천 년 전, 빙하기의 손이 그린 그림 이었다. 나라가 무너진 여름, 네 소년이 한 마을에 모였다 1940년 9월의 프랑스는 석 달 전 독일에 무너진 나라였다. 6월에 파리가 점령됐고, 사람들은 남쪽으로 흩어졌다. 몽티냑은 그 남쪽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라비다는 마을의 견습 정비공이었고, 열다섯 살 자크 마르살은 같은 마을 소년이었다. 나머지 둘, 조르주 아니엘과 시몬 쿠앙카스는 파리 쪽에서 몽티냑으로 흘러든 피란 소년들이었다. 마을에는 오래된 소문이 있었다. 숲 어딘가에 라스코 저택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고, 그 끝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였다. 며칠 전 라비다가 언덕에서 구멍 하나를 발견했을 때, 소년들이 떠올린 것도 이 보물 소문이었다. 구멍을 발견한 나흘 뒤, 라비다는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그 언덕으로 돌아왔다 . 개가 구멍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발견자가 부인했다 라스코 발견담에서 가장 널리 퍼진 장면은 개다. 로보라는 이름의 개가 구멍에 빠졌고, 소년들이 개를 꺼내려다 동굴을 찾았다는 이야기. 지금도 여행 안내판이 즐겨 옮기는 대목이다. 그런데 정작 발견자 라비다는 훗날 개 이야기를 부풀린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문화부의 공식 기록 도 그 구멍이 개가 아니라, 뽑혀 나간 나무가 남긴 자리였다고 적는다. 널리 퍼진 전설과 발견자 본인의 회고가 어긋나는 자리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BuddyDrop 심심할 때 가볍게 한 판, 매일 새로운 미니게임 ▶ Google Play에서 설치...

엿장수는 엿으로 먹고살지 않았다

1960년대 어느 골목. 동전 한 닢 없는 아이가 빈 병 하나를 들고 나왔다. 쩔꺽, 쩔꺽. 골목 어귀에서 큼직한 가위 소리가 두 번 났다. 아이는 병을 내밀었고, 엿장수는 엿 한 가락을 떼어 주었다. 병만이 아니었다. 헌 고무신 한 짝을 내밀어도, 깨진 쇠붙이를 내밀어도 엿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이 맞바꿈은 단맛을 얻는 놀이였고, 엿장수에게는 장사였다. 그리고 엿장수가 정말 팔던 것은 엿이 아니었다. 단것이 귀하던 시절, 아이들은 집 안을 뒤졌다 1960년대에는 단것이 흔치 않았다. 사 먹기보다 바꿔 먹는 편이 쉬웠다. 집 안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고물 한 조각이 엿 한 가락으로 바뀌었으니, 아이들은 안방과 부엌을 뒤졌다. 깨진 무쇠솥 조각, 짝 잃은 고무신, 구리 한 줌, 빈 병. 종이·쇠·빈 병 같은 고물을 받고 엿으로 바꿔 주는 방식 은 도시에서 특히 흔했고, 시골에서는 곡식으로도 거래됐다. 엿장수도 처음부터 손수레를 끌지는 않았다. 처음엔 엿판을 짊어지고 걸어서 골목을 돌았고, 1960년대 후반 리어카가 흔해지자 손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그 수레에는 엿보다 고물이 더 많이 실려 있었다. 가위는 엿을 자르는 연장이 아니라 악기였다 엿가위를 엿을 떼고 자르는 연장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엿가위의 진짜 쓸모는 자르는 데 있지 않았다. 소리였다. 골목 끝까지 닿는 쇳소리가 흩어져 있던 아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백과사전은 솜씨 좋은 엿장수가 가위다리를 맞부딪쳐 내는 소리에 흥을 실어 노래까지 불렀다 고 적는다. 파는 물건을 알리는 종이자, 사람을 모으는 악기였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쌤 1인 과외 학생관리 · 메모 한 줄로 수업료 청구 자동 생성 ▶ Google Play에서 설치 성악을 배운 아들이 넥타이를 풀고 가위를 잡았다 청주에 윤팔도라는 엿장수가 있었다. 팔십 평생을 장터에서 가위를 쳤고, 전국 장을 돌며 한 해 2천만 원을 벌던 때도 있었다. 젊은 날의 윤팔도는 장터에서 번 돈을 술판에 다 내던졌다. 남은 ...

기독교에서 가장 거룩한 문은 무슬림이 연다

새벽 4시 무렵, 예루살렘 구시가. 아디브 주데가 돌 골목을 걸었다. 손에는 쇠열쇠 하나가 들려 있었다. 골목 끝에는 예수 무덤 성당의 정문이 있다. 기독교에서 가장 거룩하다는 문이다. 문 앞에서 주데는 열쇠를 와지 누세이베에게 건넸다. 주데도 무슬림이고, 누세이베도 무슬림이다. 예수 무덤 성당은 여섯 교파가 나눠 갖고 있는 건물 인데, 여섯 교파 가운데 문 열쇠를 쥔 교파는 하나도 없다. 한 지붕 아래 여섯 주인이 산다 예수 무덤 성당은 골고다 언덕과 예수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자리를 한 지붕 안에 넣은 건물이다.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트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여섯 교파가 성당 한 채를 나눠 쓴다. 기둥 하나, 촛대 하나, 계단 한 칸까지 어느 교파 몫인지 정해져 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아예 성당 지붕 위에 자리를 잡고 산다. 몫을 이렇게까지 쪼개 둔 근거는 오스만 제국의 칙령이다. 1757년 술탄 오스만 3세가 성당 안의 것을 지금 있는 그대로 두라고 명했고, 1852년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다시 못을 박았다 . 여섯 교파가 전부 동의하지 않으면 성당 안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현상유지라고 부르는 원칙이다. 성당 정면 창턱에는 나무 사다리 한 개가 놓여 있다. 아무도 쓰지 않는 사다리다. 치우려면 여섯 교파가 모두 동의해야 하고, 동의는 나오지 않는다. 흔히 1757년 현상유지가 사다리를 묶어 놓았다고들 하는데, 순서는 반대에 가깝다. 사다리는 늦어도 1728년 판화에 이미 같은 창턱에 그려져 있다 . 현상유지보다 사다리가 먼저였고, 현상유지가 사다리를 그 자리에 얼려 버렸다. 사다리가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는 말도 정확하지는 않다. 1997년에 관광객 한 명이 사다리를 성당 안에 숨겨 놓았다고 전한다. 사다리는 같은 창턱으로 돌아왔다. 못 옮기는 물건이라기보다, 옮겨도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물건이다. 1187년, 열쇠가 성당 밖으로 나갔다 열쇠가 성당 밖...

일본 경찰이 소화제 약방 주인을 끌고 갔다

1919년 10월 31일 새벽, 서울 순화동. 일본 경찰이 약방 하나를 덮쳤다. 끌려간 사람은 서른여섯의 민강. 체하고 얹힌 사람들에게 물약 한 병을 팔던 가게의 주인이었다. 가게 이름은 동화약방, 물약 이름은 활명수. 목숨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이었다. 소화제를 파는 가게였는데, 경찰은 약을 찾고 있지 않았다. 궁 안에 있던 약, 궁 밖에서 앓던 사람들 활명수를 만든 사람은 민강의 아버지 민병호였다. 민병호는 궁중 선전관이었다. 임금 가까이에서 명령을 전하던 무관 자리이자, 궁중의 처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1890년대 조선에서 급체와 토사곽란은 흔한 병이었다. 배를 움켜쥐고 앓아도 집에서 달여 먹는 탕약 말고는 마땅한 약이 없었다. 약은 궁 안에 있었고, 사람들은 궁 밖에서 앓았다. 민병호는 궁중 비방에 서양 의학 지식을 붙여, 달이지 않고 병째로 마시는 물약을 만들었다. 1897년 9월 25일, 순화동 5번지 자기 집에 동화약방을 열었다 . 활명수를 한국 최초의 신약 이라 부르는 관행이 여기서 나왔다. 다만 이 표현은 회사와 언론이 함께 써 온 말이고, '신약'의 기준 자체가 느슨하다는 점은 감안해 두는 편이 정확하다. 값은 쌌던 적이 없다. 1910년대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 설렁탕 두 그릇 값이었다 . 그런데도 팔렸고, 팔린 만큼 베껴졌다. 이름만 조금씩 바꾼 유사품이 60여 종 깔렸다. 동화약방은 1910년 8월 15일 부채표를 특허국에 등록했다 . 이름을 지키려고 붙인 표시였다. 약방이 돈이 지나가는 길목이 됐다 1919년 3월 만세시위가 지나가고,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섰다. 서울에서도 4월 23일 정오 종로에서 국민대회가 열렸다. 민강은 준비자금의 출납을 맡았다 . 천도교 대표 안상덕과 기독교 대표 현석칠이 각각 600원씩 대기로 했고, 자금은 동화약방을 거쳐 가기로 정해졌다. 4월 20일, 민강은 안상덕이 가져온 500원을 김유인에게 넘겼다. 약방을 거쳐 간 500원으로 「국민대회...

쿠퍼 옆자리 승무원은 오십 년을 침묵했다

1971년 11월 24일 저녁, 시애틀 활주로.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305편의 계단으로 승객 서른여섯 명이 줄지어 내려갔다. 승무원 두 명도 따라 내렸다. 객실에 남은 사람은 스물두 살 승무원 티나 머클로 한 명, 그리고 검은 넥타이를 매고 붉은 원통과 전선이 든 서류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은 남자였다. 남자는 두 시간 뒤 현금 20만 달러를 몸에 묶고 비행기 뒷계단으로 뛰어내렸다. 미국은 오십 년이 넘도록 남자를 찾지 못했다. 세상이 오십 년 동안 물어온 질문은 하나였다. 그 남자는 누구였고 어디로 갔는가. 물어보지 않은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무원은 왜 오십 년 가까이 입을 열지 않았는가. 먼저, 이름부터 틀렸다 널리 쓰이는 'D.B. 쿠퍼'라는 이름은 납치범이 쓴 이름이 아니다. 포틀랜드 공항에서 현금으로 편도표를 사면서 남자가 적은 이름은 '댄 쿠퍼(Dan Cooper)'였다 . 사건 직후 취재 과정에서 한 기자가 이름을 잘못 옮겼고, 그 착오가 통신사를 통해 퍼지면서 'D.B. 쿠퍼'가 굳었다 . 오십 년 넘게 미국이 부르고 있는 이름은 처음부터 오자였다. 표를 살 때 신분증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71년 미국 국내선에는 승객 검색대가 없었다. 가방을 열어 보이는 절차도, 이름을 대조하는 절차도 없었다. 현금을 내면 표가 나왔고, 그대로 탔다. 미국이 국내선 승객 전원에게 금속탐지기와 소지품 검사를 통과하게 만든 것은 1973년 1월부터다 . 쿠퍼가 뛰어내리고 열네 달 뒤였다. 기장이 막내를 객실로 내려보냈다 이륙 직후, 쿠퍼는 승무원 플로렌스 섀프너에게 쪽지를 건넸다. 섀프너는 읽지 않고 핸드백에 넣었다. 혼자 탄 남자들이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쿠퍼가 몸을 기울여, 쪽지를 읽어보는 편이 좋을 거라고 했다. 가방 안에 폭탄이 있다고 했다. 기장 윌리엄 스콧은 섀프너를 조종실에 붙잡아 두고 쿠퍼의 요구를 받아적게 했다. 대신 객실...

사다코는 644마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1955년 히로시마 적십자병원. 열두 살 소녀가 침대에 앉아 종이학을 접고 있었다. 접을 종이가 모자라면 약을 싸던 포장지를 폈고, 어떤 학은 너무 작아 바늘 끝으로 접어야 했다. 소녀의 이름은 사다코 사사키. 소원은 하나였다. 낫는 것.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사다코가 644마리 에서 손을 멈췄다고 전한다. 천 마리를 채우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남은 학은 친구들이 대신 접어 관에 넣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히로시마가 남긴 기록은 조금 다른 숫자를 말한다. 폭심지에서 1.6킬로미터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 두 살 사다코는 폭심지에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집에 있었다. 폭풍이 사다코를 창밖으로 날렸지만, 화상도 눈에 보이는 상처도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했다. 남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방사선은 이미 몸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부모도 사다코도 알 길이 없었다.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방사선이 남긴 병은 몇 해가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백혈병이 그중 하나였다. 사다코는 건강하게 자랐다. 학교에서 계주 선수로 뽑힐 만큼 빠른 아이였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1954년 11월, 사다코의 목에 멍울이 돋았다 . 폭탄이 남긴 병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병실에서 접기 시작하다 1955년 2월 21일, 사다코는 히로시마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진단명은 백혈병. 의사는 사다코에게 남은 시간이 한 해쯤이라고 보았다. 사다코는 열두 살이었다. 병실에서 사다코는 천 마리 학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에는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센바즈루(千羽鶴)라 불리는 이 풍습은 병문안 자리에서 회복을 비는 마음으로 자주 접힌다. 사다코의 소원은 분명했다. 살아서 병실을 나가는 것. 종이가 모자랐다. 사다코는 약 포장지를 펴고, 손에 잡히는 온갖 종잇조각을 다 폈다. 종이가 작을수록 학도 작아졌다. 종이가 생길 때마다 사다코는 또 접었다. 만든 사람의 다른 앱 FocusB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