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주는 우리나라라고 적었다

1962년 1월 26일, 김포공항. 여객기 한 대가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트랩 아래에는 일흔둘의 노인이 서 있었다. 오래전 궁에서 어린 주인을 돌보던 유모 변복동이었다. 트랩을 걸어 내려온 여인은 대한제국 고종의 막내딸,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였다.

덕혜옹주가 조선을 떠난 것은 1925년이었다. 서른일곱 해 만에 돌아온 자리에서 옹주는 유모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래 앓은 끝에 말을 거의 잃은 뒤였다. 궁에서 자란 아이가 남의 나라에서 반평생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그 안에 조선은 아직 남아 있었을까.

나라가 사라진 뒤에 태어났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쉰아홉, 예순을 앞두고 얻은 늦둥이 막내딸이었다.

이미 나라는 없었다.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됐고, 황제였던 고종은 일본이 정한 '이태왕'이라는 왕공족의 지위로 격하돼 덕수궁에 머물렀다. 덕혜옹주는 나라가 사라진 뒤에 태어난 황녀였다.

나라를 잃은 임금이 늦둥이에게 쏟은 애정은 각별했다. 1916년,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차리게 했다. 딸 하나를 위해 또래 예닐곱을 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배우게 한, 사실상 한 아이를 위한 유치원이었다.

궁에서의 나날은 길지 않았다. 1919년 1월, 고종이 덕수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돌았고, 국장을 앞두고 3·1 운동이 일어났다. 어린 덕혜옹주에게서는 아버지이자 가장 큰 울타리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공주가 아니라 옹주였다

덕혜는 흔히 '덕혜공주'로 불리지만, 정확히는 공주가 아니라 옹주다. 왕비가 낳은 딸이 공주, 후궁이 낳은 딸이 옹주였다. 덕혜의 생모 복녕당 양씨는 고종의 후궁이었다. 옹주라는 한 글자에는 어머니의 자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후궁의 딸이라는 자리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몇 해 뒤에 드러났다. 1925년 3월, 열두 살 덕혜옹주는 경성역에서 도쿄행 열차에 올랐다. 유학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옹주가 정한 것은 없었다. 왕공족을 관리하던 이왕직이 통고했을 뿐이다.

도쿄의 귀족 학교에 편입한 덕혜옹주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다. 1929년 5월, 어머니 양씨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장례에 서려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일본은 정식 상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궁의 딸이 생모의 상복을 갖춰 입을 수는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장례에서, 딸은 옹주라는 이유로 상복 한 벌을 갖추지 못했다. 어머니를 묻고 며칠 뒤 덕혜옹주는 다시 일본으로 보내졌다.

이듬해 봄, 도쿄로 돌아간 덕혜옹주는 학교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30년 가을, 열여덟 살의 덕혜옹주는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당시에는 정신분열증이라 부르던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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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병을 안은 채, 덕혜옹주의 삶은 옹주의 뜻과 무관하게 흘러갔다. 1931년, 덕혜옹주는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했다. 이듬해 딸 정혜가 태어났다.

소 다케유키에게는 오랫동안 냉혹한 남편이라는 상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기록에 남은 소 다케유키는 영문학을 공부한 조용한 학자이자 시인이었고,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내 무너진 것도 옹주의 병이 깊어진 뒤였다. 정략으로 맺어진 자리에서도, 옹주가 스스로 고른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병세는 점점 깊어졌다. 1946년부터 덕혜옹주는 도쿄의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들어가 15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병원에 머무는 동안 곁에 남아 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1955년 소 다케유키는 이혼을 청했고, 이듬해 여름 딸 정혜가 산에 유서를 남기고 자취를 감췄다. 훗날 발견된 시신이 정혜로 확인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덕혜옹주는 살아 있는 동안 딸의 생사를 끝내 알지 못했다.

잊혀 가던 옹주를 다시 찾아낸 사람은 기자 김을한이었다. 김을한은 도쿄에서 덕혜옹주의 존재를 확인하고 귀국을 밀어붙였고, 1961년 박정희가 협조를 약속하면서 길이 열렸다. 그리고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마침내 김포 땅을 밟았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오랜 요양을 거쳐 1968년 창덕궁 낙선재로 옮긴 덕혜옹주는 여전히 말이 거의 없었다. 다만 정신이 맑아지는 날이면, 옹주는 종이에 몇 줄을 적었다. 그 가운데 한 장이 지금까지 전한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가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전하 비 전하'는 같은 낙선재에서 지내게 된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부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말을 거의 잃은 사람이 또렷하게 적어 둔 한 장에는, 살고 싶은 집과 보고 싶은 사람, 그리고 나라의 이름이 있었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일흔일곱. 낙선재에서 오래 살고 싶다던 쪽지대로, 눈감을 때까지 낙선재를 떠나지 않았다. 궁에서 태어난 아이가, 궁에서 눈을 감았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나라는 대한제국이었고, 마지막에 손으로 적은 나라는 대한민국이었다. 그 사이에서 옹주는 상복 한 벌도, 자기 결혼도, 딸의 생사도 스스로 정하지 못했다. 반평생을 남의 나라에서 앓다 돌아온 사람이 또렷하게 남긴 것은, 정하지 못한 것들이 아니라 돌아갈 자리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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